신화보리 2015. 3. 18. 01:42

작업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Liar’라는 타이틀 아래 민우에게 다른 곡을 들려주고는 안심시킨 후, 녀석과 나의 프로젝트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D-1. 신화라는 이름의 앨범이 거의 2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될 날이 다가온 것이다. 설레임. 두려움. 그 공존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며 우리는 해냈다. 드디어.. 라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가 있었다.


‘빨리와.미누심각해.’
‘왜????’
‘씨디들었나봐.’
‘벌써?’

연습실에 들어온 후 민우는 아무 말 없이 구석에 가 눈을 감은 채 앉아있었다. 자는 건지 생각을 하는 건지 가서 물어보기도 난감해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러다 눈에 뜨인 것이 민우의 손에 들려진 우리 7집 씨디였다. 씨디와 민우의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 대충 짐작이 되는 상황인지라 정혁이에게 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다 왔으니 민우 좀 살피라는 정혁이의 말에 겨우 용기를 내어 민우를 깨웠다.

“뭐해. 어디 아퍼?”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내 물음에 천천히 눈을 뜨며 나를 노려보는 민우의 눈에 미움과 원망 같은 것이 보였다.

“에릭.”
“어, 어?”
“어딨어.”
“다, 다왔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와 거의 동시에 민우가 일어서며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끝에 정혁이가 있었다. ‘퍽-’ 민우가 주먹으로 힘껏 녀석의 가슴을 쳤다. ‘윽-’ 소리를 내며 정혁이가 뒤로 한걸음 주춤했다. 알아서 피하리라 생각하고 나서지 않았건만 의외로 정혁인 민우의 주먹을 모두 맞고 있었다.

“좋냐?”
“......”
“좋냐구! 어?”

퍽- 퍽- 저러다 가슴에 멍이라도 드는 게 아닌지. 문정혁 저 자식, 꼭꼭 숨어만 있던 가슴 안의 시퍼런 멍이 정말 생기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야, 문정혁.”
“......”
“야! 문에릭!!”
“......”
“새끼야, 니가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 날 속이면서까지 그런 노래를 한 이유를 말해.”
“......”
“어? 말을 해보란 말이야, 자식아!”

정혁이는 어금니를 꽉 깨무는 듯 보였다. 민우의 주먹에 대한 고통 반, 쏟아지는 말들에 대한 고통 반. 그렇게 민우의 주먹에 점점 힘이 들어가자 아픈 듯 더 이마를 찡그렸다. 그리고 결국 그대로 민우를 와락 껴안아 버렸다.

“너 진짜 왜 이러냐.”
“......”
“니가 그랬잖냐. 친구로 지내자며.”
“어.”
“온갖 구구절절 온갖 청승 다 떨면서 헤어지자고 한 거 너야...”
“알아... 나도 알아.”
“근데 새끼야...”
“......”
“니가 그렇게 화내고 울고... 니탓이다 다 내 잘못이다 해놓으면, 내가 널 못 놓잖아.”
“... 미안해.”
“바보냐.”
“어.”
“바보냐.”
“어, 나 바보다.”
“이 씨발놈아...”

민우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정혁이가 너무 꽉 안아 아팠다고 그래서 떨렸던 거라고 나중에는 변명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퍽- 퍽- 안긴 채 버둥거리며 민우는 다시 정혁이에게 주먹질을 해댔다. 하지만 이젠 민우의 가슴이 새까맣게 멍이 들어갔다.

“니가 그랬잖아, 자식아. 씨발놈에 자식아, 니가 날 버렸잖아. 니가...”
“사랑해..”
“......”

순간 모든 게 멈춘 듯 했다. 멍한 눈으로 정혁이를 바라보는 민우. 모두의 시선이 꽂힌 정혁이의 자리. 내 귀마저 의심이 갔다. 문정혁이 지금... 뭐라고 말한 것인가.

“씨불이지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민우야.”
“하지마..”
“사랑해, 민우야. 내가 잘못했어.”
“하지마. 하지마!!”

민우가 소리쳤다. 쩍쩍 갈라져 쇳소리만 나오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 사랑하지 마. 힘든 선택 하지 마. 더 이상은 하지 마. 그 아무것도...

“사랑해, 이민우. 잘못했어. 내가 안 돼. 내가 더는 안 돼.”
“하지마.. 하지말라구!!!”
“내가 진짜 잘못했어. 다시는 그런 말 안할게.”
“......”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니가 날 이해할거라고 생각했다고!”

아... 눈물이 핑 돌았다. 연습실의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 어리고 아픈 연인들을 바라봤다. 세상의 시선과 뒷소문에 대한 두려움, 더 이상 민우를 아껴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책감에 결국 버려야했던 정혁이와 버려야만 했던 정혁이를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하루하루 괴로워하며 사는 민우. 그 억울한 사랑에 공감해 내 가슴이 녀석들처럼 까맣게 멍들어 갔다.

“너...”
“......”
“정신 못 차렸지...”

그 순간 느꼈던 한기란... 분노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민우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말리려 준비하던 이들도 모두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이건 아니다. 문정혁이 타이밍을 제대로 못 맞춘 듯싶었다.

“너한텐 내가...”
“......”
“사랑하지 말라 그럼 네 하고 사랑 안하고, 사랑한다 그럼 네 하고 사랑하는... 개새끼지. 너 아직도 나랑 개새끼랑 구분 못하지?”
“민우야.”
“놔!”

날카로운 비명과 같은 소리에 숨이 멈추는 듯 했다. 저만치 나가떨어진 문정혁과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민우. 처음이었다. 이민우가 문정혁의 뺨을 제대로 날렸다.

“무슨 짓이야!”
“싫어, 너.”
“민우야!!!”

순간 뛰쳐나가는 민우를 아무도 잡지 못했다. 정혁이도 본능적으로 달려가 팔을 뻗었지만 민우가 한 박자 빨랐다. 최악이다. 녀석들의 사랑에, 우리들의 공간에 최대 위기가 찾아와 버렸다. 우리의 가운데서 늘 웃고 우리를 지탱하던 녀석이 사랑에 앓아 곪아버렸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방관하고 있었다. 그들만의 일이었다 치부한 채.

“민우한테 전화해봐!”

누군가 밖으로 뛰쳐나가며 외쳤다. 동시에 핸드폰 통화를 눌렀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받지 않는다. 받을 리가 없었다. 정혁이를 일으키며 받길 바랬다. 돌아와, 민우야. 제발 돌아와... 탁탁탁- 나갔던 누군가가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혜성이었다.

“민우는?”

정혁이의 목소리가 급했다. 하지만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손에 쥐었던 것을 내미는 혜성이.

“......”

산산조각이 난 민우의 핸드폰이었다.



“예, 어머님. 제가 잘 챙길게요. 서울 오시면 꼭 연락주세요.”
“... 없대?”
“......”

민우의 친구들에게 연락했지만 연락두절. 결국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 연락을 했지만, 어른들의 안부 외에는 들을 수가 없었다. 민우는 그렇게 연습실을 뛰쳐나가고 사흘째 어디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에릭 들어오면 우선 우리 컴백 날짜부터 늦추자.”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혜성이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권영이형에게는 자신의 다리가 아파 쉬고 싶다 말하겠다며, 녀석답게 일단 총대를 멨다.

“진이는 안무 다 알지.”
“어.”
“그래. 그럼 우리 일단 계속 연습하는 거야.”
“민우형도 없는데...”
“그럼 너 민우 없다고 아예 안할 생각이었어? 내가 민우라면 멤버들이 나 없어도 잘하고 있으리라고 믿을 거야.”
“......”
“돌아왔을 때 실망시키면 안 돼. 그럼... 민우 정말 울어버릴 거야.”

우리 사이에서도 민우가 운다는 사실은 특별했다. 많이 기쁠 때, 많이 슬플 때, 많이 속상할 때, 많이 힘들 때... 항상 그 감정이 극대화로 커지지 않는 한 민우는 울지 않았다. 어쩌면 감정표현이 서투른 탓에 못 운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혜성이의 리드에 우리는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아온 정혁이에게도 이야기를 하자 반발이 없어 무리 없이 컴백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민우를 기다리며...



Rrrr... 벨이 울린 건 막 녹음이 끝나 철수하던 새벽 4시쯤이었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새벽 열대야라도 감상할 겸 선호와 한강으로 향하는 길에 낯선 번호가 나를 찾았다.

“뭐야, 팬 아니야?”
“설마. 이 새벽에.”

대부분의 전화를 의심 없이 받는 타입인지라, 팬이든 장난전화든 받고 그 자리에서만 열 내고는 식어버리곤 했다. 역시 그날도 으레 그런 전화려니 생각했었다.

“여보세요.”
[......]

조금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 나.]
“나가 누구...”

순간 머릿속을 지나가는 인영 하나.

“민우야!!!”
“민우형이야?”

선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하고는 혜성이에게 전화하라고 시늉을 했다. 그리고 다시 수화기 건너의 ‘민우’일지도 모르는 이에게 집중을 했다.

[금방 알아듣네, 고맙게.]
“야, 이 자식아. 너 무슨 짓이야.”
[그래도... 5일 만에 나타났잖아. 뭘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 몰라?]
“... 전화 바꿨어?”
[어, 최신형이야. 나...]
“전화번호는 왜 바꿨어.”
[......]

나의 물음에 건너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끊을까말까 망설이는 듯 간간히 한숨도 들려왔다. ‘신규가 더 싸다 그래서...’라며 대충 얼버무리고는 멤버들의 안부와 일의 진행사항을 물어와 꼼꼼하게 대답해주었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이따가 갈 테니 걱정 말라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그 와중에 정혁이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형, 바꾸래.”
“혜성아.”
[어. 민우한테 전화 왔었다며.]
“어, 근데.”
[왜.]
“민우 번호 바꿨다.”
[......]
“무슨 뜻인지 알지?”
[오늘 온대?]
“내가 일단 오늘 연습은 얘기해줬어.”
[그래, 알았어.]
“우리 오늘 단단히 각오해야 돼.”
[......]
“민우... 목소리도 바뀌었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런 극단적인 결과가 다가올 줄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정혁이와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기 전, 민우는 딱 한번 연애한 적이 있었다. 그 여자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이유로 후유증이 극도로 심했다. 저놈 저러다 미쳐서 까무러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내가 전화로 접한 민우의 목소리는, 마치 그때 같았다.



삐걱-

“안녕, 친구들~”

잠시 쉬고 있던 사이 누군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연습실로 들어섰다. 후드잠바 주머니에 한손을 깊게 찔러넣은 채 나머지 한손으로는 정말 반가운 듯 이리저리 손을 흔드는 이는 민우였다. 턱수염도 제대로 손질되지 않은 것이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모두들 정말 오랜만에 민우를 보는지라 까칠해진 얼굴을 걱정하기보단 반가운 마음이 먼저라 달려들어 안기 바빴다. 이 바보는 이렇듯 우리에겐 소중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안무 안 틀리고 잘했네.”

없어진 그 며칠 동안을 굶었는지 허겁지겁 밥을 먹는 모습에 깜짝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촬영간 정혁이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 역시 그랬다. 아마 처음인 듯 하다. 소식주의자인 민우가 저렇게 게걸스럽게 먹다니.

“왜-”
“야, 체해.”
“그동안 밥을 제대로 못 먹었어.”
“굶는 건 니 인생 아니었냐?”
“그놈에 인생 바꾸지, 뭐.”

인생이 바뀐다고 니놈까지 바뀔 이유는 없잖냐. 결국 그렇게 먹는 민우를 말릴 생각 없이 우리도 다시 밥을 먹는데 열중했다. 어린애라면 말리겠지만 스물여섯이나 처먹은 녀석인걸.

“우욱-”

아니나 다를까. 잘 먹던 민우는 먹던 수저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빠르게 화장실로 향했다. 민우의 갑작스런 행동에 식당 안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빠르게 민우의 뒤를 따랐다.

“민우야-”

따라 들어갔을 때는 이미 물 내리는 소리가 난 후였다. 소리가 난 칸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민우가 보였다.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자꾸 바보짓거리 할래.”
“하아- 내가 뭘.”
“며칠로 안 되냐.”
“... 넌 3년이 며칠로 되냐.”
“벌써 그렇게 됐냐.”
“하하, 미안하게 됐다.”

민우는 참 쓸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3년 넘게 사랑한 정혁이와 닮아있었다.

“어디 갔었어.”
“제주도.”
“... 거긴 왜.”
“그 새끼가 나한테 사랑놀이 따위 그만하자고... 한데 갔었어.”
“......”

목이 메이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안쓰러운 마음에 괜히 물어봤다 싶어 일어나려는데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두고 왔어.”
“... 삽질 그만하고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피식 웃으며 내손을 잡고 일어나는 녀석. 가벼운 느낌에 살이 많이 빠진 듯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부턴 무식하게 먹지 마.”
“응.”

두고 왔다. 민우가 과연 그곳에 두고 온 건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마음? 정혁이와의 추억? 내게 그것들은 잠시 소중한 과제였지만 이내 금방 잊혀져버리고 말았다. 사람이란 이렇듯 무심한 존재였다.



위태롭게 컴백날짜는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에 있어선 여전히 좋은 파트너였고,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무서웠다. 터지진 않을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랄까. 웃음이 없는 민우는, 장난끼 사라진 정혁이는 이미 제 모습들이 아니었다.

“야~ 정필교!”

7집을 발표한 이후 거의 3주 만에 쇼케이스를 가졌다. 대기실 저쪽에선 아직 안무를 헷갈려하는 혜성이 때문에 정혁이와 진이가 시끄럽게 녀석을 가르치고 있었다. 민우와 선호도 꽤 긴장되는 듯 내내 백댄서들과 안무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소속사를 옮긴 후 처음으로 나오는 앨범. 후우-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긴장감은 무엇이더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한 스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고는 다시 모여 뒤풀이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성공적으로 끝나 싱글벙글 이던 권영이형이 한턱 쏘겠다며 모두를 불러 모이게 한 것이었다.

“저기 형-”

한참 이야기가 진행될 때 민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민우 왜?”
“나 몸이 별로라서 먼저 들어가면 안 될까요?”
“그래? 그래도 좀 자리에 있다가 가지. 너네 축하파틴데.”
“좀 안 좋아.”
“그래, 그럼 먼저 가. 누가 민우 좀 데려다줘.”
“아냐, 됐어. 혼자 가도 돼요.”

권영이형의 말에 꾸벅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는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녀석. 쓰러질듯이 아프지 않는 한 이런 모임은 꼭 참여하는 녀석이라는 걸 알기에 안색을 살피게 되는 건 거의 본능이었다. 직감적으로 녀석이 아프지 않다는 건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정혁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 머리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일어나 옆자리의 허전함을 느끼고 두리번거렸다. 분명 어젯밤 정혁이와 함께 두녀석이 사는 집에 와서 잔 것 같은데 정혁이녀석이 없어진 것이었다.

“아, 이 자식. 또 민우랑 껴안고 자나.”

지난일이 문득 떠올라 침대에서 내려서자,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에 엎어져 자고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 녀석의 잠꼬대에 정신을 차렸다.

“자식아, 멀쩡한 침대 놔두고 왜 바닥을 굴러-”
“아이.. 몰라- 꺼져.”

얼씨구. 툭툭 발로 차자 꼼지락거리며 피하는 게 영락없는 귀차니즘의 모습이었다.

“아, 민우-”

문득 아프다며 나갔던 민우가 생각났다. 집이라곤 여기뿐인데 아프다던 녀석이 어딜 간 건가. 그러고 보니 어제 왔을 때도 민우는 없는 듯 했다. 간밤 취중이라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생각났다.

“야, 민우 어디 있어.”
“... 몰라. 어디 있겠지. 방에 없어?”
“여기가 방이잖아.”
“작업실...”

정혁이의 말에 작업실로 쓰는 건넌방에 가봤지만 역시 없었다.

“얘, 실종?”

아니면 멀쩡한 집 놔두고 어딜 가겠느냔 말이다. 한참 생각하다 마지막 모습이 스쳐갔다.

“없어?”

그제야 일어난 듯 배를 벅벅 긁으며 정혁이가 내 뒤에 섰다. ‘친구네라도 갔나보지.’라는 말에 주먹을 잠시 쥐었다 폈다. 전화를 하려고 하자 오버스럽게 전화를 뺏는 행동이 녀석 같지가 않았다.

“오늘 스케줄 있어.”
“알아.”
“... 우리도 준비하고 나가자.”

‘어린애도 아닌데 알아서 하겠지.’라 얼버무리며 녀석이 욕실로 향했다. 민우의 부재가 녀석도 마음에 걸리기는 걸리는 모양이다.



그 후로도 민우는 종종 스케줄 후 단체모임에서 모습을 감췄고, 스케줄이든 연습이든 부쩍 말수가 줄어든 모습을 보여 모두를 당황케 했다. 10월의 문턱에 들어서자 민우의 증세는 더더욱 심해져 거의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장난을 쳐도 조금 살풋이 웃을 뿐, 전처럼 시끄럽게 섞여 떠들거나 어울리지를 않았다. 그리고 녀석의 변화된 모습에 반격이라도 하는 듯 멤버들을 향한 정혁이 장난은 더더욱 심해져 갔다.

“민우야.”
“어?”
“잠깐만-”

잠시 짬을 내 민우를 붙잡고 조용한 곳으로 갔다. 내 앞에서의 민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왜.”

한참을 말이 없자 ‘응?’하며 되묻는 호기심 많은 모습도 그대로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너 요새 무슨 일 있어?”

다시 ‘응?’하며 묻는 것이 정말 못 알아들어서 그런 건지, 확인차 묻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녀석 나름대로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일은 무슨.”
“아파보여서.”
“......”

말도 안 된다며 웃다 질끈 입술을 깨무는 녀석. 또 못된 버릇 도진 듯 하다. 한참 고민을 하는가 하더니 겨우 입을 연다.

“에릭이 말 안 해?”
“뭘?”
“나, 여자친구 생겼어.”
“......”
“에릭이랑도 만났었는데, 말 안 해?”
“여자친구?”
“... 뭐, 그런 걸로 그렇게 놀래냐?”
“아, 아니.”

놀랠 것이 당연했다. 이민우는 문정혁, 문정혁은 이민우라는 공식이 지난 3년 동안 깨지지 않았었고 그들을 바라보는 나 역시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문정혁에게 여자친구가 생겨도 별 감흥이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어차피 문정혁은 이민우였기에. 하지만 민우는 달랐다. 민우에게 여자친구라니...

“어, 얼마나 됐어?”
“좀 됐어.”
“누군데?”
“그냥 대학생이야. 상준이 친구 동생이래.”

상준이 친구동생이고 나발이고... 갑작스레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괜히 물어봤단 생각까지 들었다. 이 주체할 수 없는 혼란에 두통까지 생기는 듯 했다. 문정혁이야 연애경험이 숱하게 많다 치지만... 하긴 민우는 정혁이와 사귀기 전까지는 대한의 건아 아니었던가. 자기가 남자랑 연애하게 될지 꿈에도 몰랐다며 웃던 게 생각이 났다.

“얘기 좀 하지. 난 니가 어디 아픈 줄 알았잖아.”
“에릭이 얘기한 줄 알았지.”
“아무튼...”
“... 알았어.”

눈빛만 봐도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다는 듯 웃으며 나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어쩌면 말 못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너 정혁인 어떡할래. 이 말을... 나를 향해 웃던 녀석이 또다시 찬찬히 말을 이어갔다.

“... 에릭이랑 나 아주 끝난 거 아니야.”
“......”
“우린 니가 생각하는 거보다 깊게 서로를 생각하고 안아온 사이야. 그래서 더더욱 서로를 못 놔. 난... 그땐 몰랐는데 그 자식 말도 이해가 가더라.”
“... 뭐랬는데?”
“한때의 격한 감정에 나를 잃기 싫어 영원을 택하겠다고.”
“......”
“그땐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그때 많이 생각했었어.”
“생각은 무슨 생각.”
“나도 걜 잃기 싫어.”
“......”
“걔 얼굴을 날리고 뛰쳐나가서 한참을 울었어. 나쁜 새끼네, 씨발놈이네 욕이란 욕은 다 갖다 붙였어. 바보멍청이라고. 우리가 아직도 연애질 하는 줄 아냐고...”

정혁이 얘기라면 민우는 줄줄줄 할 얘기가 늘 많았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게 오로지 ‘그 녀석’이라고 했다. 한참동안 민우는 그동안 내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죽 늘어놓았다. 결론은 이제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마라.”
“자식아, 그 말이 더 무섭다.”
“하하하, 그런가?”

허탈하게 웃는 모습이 싫어 등 떠밀어 앞에 세워 보냈다. 연습실로 돌아가는 내내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여튼 말은 진짜 멋있게 하지.”

정혁이를 다 이해한다고 이젠 좋은 친구 사이라고, 더 이상은 아무 미련 없다고 이젠 다 추억일 뿐이라고 멋들어진 말들을 했지만 정작 두녀석은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그것이 꽤나 오래가고 있어 나를 비롯한 모두의 걱정은 줄어들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