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남자 1
사람들이 왜 그를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인인 선호가 아무리 귀엽다고 난리를 쳐도 내 눈에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내놈이었다. 니가 선호한테 콩깍지가 씌어서 그래. 찬바람
쌩쌩 불게 날카롭기만 한 녀석보다는 동글동글 아기자기한 선호가 훨씬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냐는 내 말에 팔불출이라는 동완이의 핀잔도 있었지만,
아니 난 아무리 배고파도 맛없는 건 절대 먹지 않는 예민한 미식가에 예쁘고 귀여운 것만 보면 환장하며 달려드는 탐미주의자라 그런 건 꽤나
객관적이라고 자신한다. 나의 이런 취향에 선호가 변태아저씨라며 혀를 내두를 만큼.
그런데 어느 날부터였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녀석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위험한 남자
chapter 1. 내 남자의 남자친구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선호의~ 생일 축하합니다~”
선호의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아 혜성이가 하는 까페를 하루 빌렸다. 어차피 휴일이니 괜찮다는 녀석 거절에도 주머니에 몇 푼 성의껏 찔러주고, 선호를 통해 친해진 절친
동완이를 꼬드겨 풍선을 불어 바닥에 깔고 여러 가지 장식을 진열하는 등등 해서 제법 파티장스러운 내부를 연출해 냈다. 선호에게는 서프라이즈였기
때문에 선호의 절친인 민우에게 선호를 속여 모르게 데려올 것을 부탁했고, 시간이 되자 두 눈이 가려져 까페에 들어선 선호는 눈을 뜨며 내가 내민
케이크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초를 껐다.
“뽀뽀해! 뽀뽀해!”
짓궂은 친구 녀석들의 외침에 초를 끄고 선호의
콧잔등에 묻힌 크림을 핥자 야유가 터졌고, 내 깜짝 파티에 선호가 들떴는지 손만 잡아도 부끄러워하던 평소답지 않게 내 얼굴을 붙잡고는 진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제대로 염장이었는지 친구들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고 지랄이다.
“하라고 해서 했더니 왜 지랄이야!”
“에라이- 나도 애인이랑 밤을 불태울 거다!!”
민우의 목소리가 실내를 쩌렁쩌렁 울렸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호를 만나 두 번째로 맞는 선호의 생일파티는 이렇게 즐겁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선호야, 일어나. 집에 가자.”
“으응...”
“얼마나 마셨어?”
“혀엉...”
“그래, 업자. 집에 가자~”
파티에 놀러 온 다른
친구들이랑 노느라 잘 살피지 못했는데 그 사이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인사불성이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녀석을 겨우 업고 까페문을 여는데
귀가 찢어질 정도로 칼바람이 불어 그냥 까페에서 잘까 잠시 고민했다.
“어? 아직 안 갔어?”
까페에서 자봐야 더
춥겠구나 생각이 들어 큰길로 향하는 길을 따라 열 걸음 쯤 언덕진 길을 내려가는데, 민우가 전화기를 붙든 채 신경질적으로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고는 운동화 바닥으로 짓이긴다. 늘 바보가 아니냐는 오해를 살 정도로 생글생글하던 녀석이라 그런 화난 모습은 처음 봐 넋을 놓고 쳐다보는데
내 목소리에 녀석이 흠칫 놀라더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내 쪽으로 다가와 등에 있는 선호를 살폈다.
“엄청 들이붓더니
떨어졌네.”
“응. 집에 데려다 줘야지.”
“오늘 생파기념 불타는 밤은 물 건너 간 거야?”
“이 새끼, 니가 제일 많이
먹였지?”
녀석의 빈정에 정강이를 툭 차자 아프다며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징징댄다.
처음 녀석을 본 건 2년 전, 그러니까
우리가 사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호가 가장 친한 친구라며 내게 소개시켜줬다. 말하지 못할 이유로 고등학교 때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혼자
원룸에서 사는데 어른들에게는 사근하니 붙임성도 좋아서 선호의 엄마가 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했다.
“귀여워라. 니 등인 건 아나보다.
잘도 쳐 자네.”
“말 진짜 곱다. 그리고 너 형이라고 하라고 했다.”
“형은 무슨. 얘도 나한테 형이라고 안하는데.”
“몇 달 차이가 무슨 형이야.”
“아, 됐어. 애 깨.”
민우와 나의 투덕거리는 그거 하나였다. 선호와 민우는
동갑인데 -물론 7월생과 1월생이라 년도는 틀리지만 같은 학년이다- 선호는 나를 형이라고 제대로 부르고 민우는 나를 형이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민우를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을 엄청 경계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때 당시만 해도 스킨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선호였는데, 민우는 아무리 만져대도 가만히 있거나 반응해 봐야 아주 작은 반응인 것이다. 얼굴이나 손을 만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고, 간혹
선호의 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거나 성감대인 귓바퀴에 바람을 불어 괴롭히는 짓들은 애인인 나도 잘 못하는 장난인데 엄청 쉽게 해대니, 처음에는 둘
사이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선호를 의심한 건 아니지만 민우와의 일 때문에 싸운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라. 그래서 날을 잡아 삼자대면을
하고 두 사람이 눈 맞을 일은 절대 없다며 각서를 쓰고 지장까지 찍고 -지금 생각하면 완전 오바다– 난리를 쳤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열 뻗치게
했던 주인공이 내 눈 앞에서 실실 대고 있다.
“근데 너 여태까지 여기서 뭐해?”
“나? 음... 겨울밤하늘 감상 중.
아름답지 않냐?”
“퍽이나.”
헤헤- 내 빈정거림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녀석이 좀 어색했다. 민우가 요즘 고민이 있는
거 같은데 나한테도 말을 안 해. 얼마 전 교내식당에서 밥을 먹다 시무룩한 얼굴로 푸념하던 선호가 떠올랐다. 선호도 걱정을 하고 하니 물어볼까
하다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애인 친구가 고민 있다고 들어주는 입장도 웃기니까 나중에 선호한테 물어봐야지.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봐 봤자 신경
꺼- 대답할 녀석도 뻔했다.
“너 신비주의야?”
“뭔 또 헛소리야.”
에라이, 모르겠다. 니가 알아서 해라.
작별인사를 하고 끙차- 소리를 내며 선호를 고쳐 업는데 민우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제 목도리를 푼다. 그리고는 내 목에 그 목도리를 칭칭 감기
시작했다.
“춥게 뭐냐. 얼어 죽을 겨울에 멋 내냐?”
“어얼, 민우자기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됐다. 너 감기
걸리면 선호가 백프로! 옮으니까 그런 거지. 니가 뭐가 이쁘다고 걱정을 하냐?”
“쳇.”
그래도 목에 둘둘 둘러진 제법 긴
민우의 하얀 목도리 덕에 조금 추위가 덜어졌다.
“선호야, 행님 간다. 내일 보자~”
민우는 선호를 쿡쿡 찌르더니
깰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게 손인사를 하며 내가 걸어왔던 길로 다시 올라갔다. 빤지 얼마 안 된 듯 민우의 목도리에서 좋은 향이 났다.
“으응...”
“깼어?”
“응? 여기서 뭐해?”
“선호 자는 거 감상했지.”
“집에
안가고 여기 있었어?”
“응. 추워서.”
선호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학교 근처로 작은 원룸을 얻어 혼자 살고 있다. 같이
살자고 몇 번 말했지만 동네에 소문나면 어쩌냐며 안 해도 되는 걱정으로 조금 서운하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 같은 경우에는 친구들이 많이
들락날락하니 차라리 각자 사는 게 나을지도라며 나를 위로했다. 머리에 곱슬거리는 새집을 지은 선호가 침대에서 꼬물대다 십분 만에 일어나 터덜터덜
주방으로 향한다. 후아암~ 기지개를 켜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벌컥대며 마신다. 이것이 선호의 일상. 물병 째 나발을 불던 선호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새하얀 목도리를 보더니 슥 줍는다.
“민우 왔었어?”
“아니, 어제 가게 나오면서 보니까 가게 앞에 있던데.”
“이거 나 둘러준 거야?”
“......”
아니.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목이 매여 타이밍을 놓쳤다. 선호는 목도리를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가지런히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민우 목도리 이거 하나 밖에 없는데 갖다 줘야겠다.”
“선호야.”
“응?”
“민우 무슨 고민 있는지 물어봤어?”
“아니, 근데 요즘 진이 얘기도 안하고 고민이 있는 거
같기는 해.”
“민우 애인?”
“응. 전진.”
진이라는 말에 본 적도 없는 녀석을 떠올렸다. 선호의 말에 의하면 그
진이라는 놈이 고등학교 다닐 당시 -분명 남학교라고 들었다.- 그 학교 학생들의 만인의 연인, 최고의 아이돌인 민우를 독점하기 위해 자살소동까지
벌였다는 것이다. 민우가 왜 너네 학교 아이돌이냐 이해가 안가 묻고 싶었지만 선호가 너무 신나게 얘기해서 그냥 묻어버렸다. 무튼 학교에서
공개적으로 그러니 민우는 하는 수 없이 두 손 두 발 다 들며 항복을 했고 두 사람은 4년째 교제 중. 본적은 없지만 너 따위랑은 비교도안 되게
잘생겼어. 라며 빈정대던 민우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라 뒷목을 잡았다. 목도리 빌려줘서 땡큐라는 거 취소. 선호가 자장면이 먹고 싶다며 중얼대
전화기를 들어 중국집에 전화를 했다. OO오피스텔 728호요. 간짜장 둘.
“어? 시켰어?”
“응. 간짜장.”
“근데 나 핸드폰 어디 있지?”
없었나... 이리저리 뒤적거리는 선호를 놔두고 일단 내 휴대폰에서 선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지만 신호만 가고 받지 않는다. 하지만 금방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선호번호다.
“네.”
[에릭자기야?]
“헐... 신혜성.”
[너 선호 핸드폰에 에릭자기라고 되어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응. 사실이니까.”
[너 진짜
심하게 푼수 같은 거 알어?]
“알지, 그럼~”
[에라이- 언제 찾아갈 거야.]
“큭큭- 점심시간에 갈게.”
어제 까페에서 술을 마시면서 꺼내놓고는 미처 챙기지 못한 모양이다. 선호에게 혜성이네 까페에 있대. 이따가 찾으러 가자. 라고
하니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이라며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아, 형. 민우거 번호 저장되어 있어?”
“아니.”
그러고 보니 선호를 통해서이긴 했지만 2년을 넘게 친구처럼 지내면서 민우의 번호를 궁금해 한 적도, 녀석이 내 번호를 궁금해 한
적도 없었다. 나도 그렇고 그 녀석도 그렇고 선호에게 전화하면 으레 그 옆에 있겠거니 했던 것 같다. 선호가 내 손에 들린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능숙하게 번호를 누른다. 요즘은 전화번호 외우기 힘들다던데 녀석의 번호는 외운 모양이다. 선호야, 내 번호는 외웠어?
“어,
민우야. 어디야?... 나 자장면 먹을 건데 올래?... 응, 얼른 와.”
용건만 간단히. 짧은 통화가 끝나고 다시 내게 건네는데
액정에 미등록 번호라며 숫자가 깜박대고 있다. 전화번호저장을 누르고 ‘민우’라고 저장을 했다.
“형, 간짜장 하나만 더 시켜줘라.
민우 금방 온대.”
“민우도 간짜장 먹어?”
“응. 난 원래 그냥 짜장 먹었었는데 민우가 간짜장이 더 맛있다고 해서 먹었는데
맛있는 거야. 그때부터 간짜장 먹었지.”
선호는 민우의 일이라면 6박 7일을 말해도 모자랄 것 같다. 민우가 얘기라면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조용한 성격의 선호도 민우에 대해서는 애국가처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보면 민우도
선호의 얘기라면 그랬다. 기껏해야 고등학교 동창인데 저렇게나 친해질 수 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아, 나 또... 쫌생이 된다.
“예. 아까 시킨 덴데요. 728호요. 출발했어요?... 그럼 간짜장 하나만 더 갖다 주세요.”
난 원래 자장면 안
먹었는데. 음식은 가리지 않고 다 먹는 편인데 정말 자장면만큼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선호는 자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원래 숙취에는 자장면이라니까.”
“도대체 그 근거 없는 망설은 어디서 들은 거냐.”
내
시비조의 말에 민우가 입술을 쭉 내밀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내가 먹다 남은 자장면을 가져가더니 슥슥 제 그릇에 부어 내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주셨다. 내가 경이로움에 박수를 치자 입가에 묻혀가며 먹던 녀석이 브이를 날린다. 하여튼 웃긴 녀석.
“커피 없다...”
선호가 주방 찬장을 열더니 커피믹스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민우가 자주 짓는 표정으로 징징댔다. 선호는 밥을 먹고 꼭 커피믹스를 탄
커피를 먹어야 직성이 풀리니 제가 나갈 수 밖에 없다며 한숨을 쉰다. 대충 추리닝에 잠바를 추슬러 입고는 비니로 머리를 감추니 제법 말끔한
모양이다. 갔다올게~ 손을 반짝반짝 흔들고는 재빨리 나가버린다. 덩그러니 선호의 집에 둘이 있으려니 이것도 어색해 죽을 지경이다. 좁은 거실에
남겨져 민우는 거실벽에 등을 기대어 티비를 보고 나는 거실에 팔다리 모두 자유롭게 대자로 누웠다. 솔솔 베란다 창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잔뜩
몸을 웅크리고 몸을 돌리는데 녀석의 손이 보였다. 싸움질 한 번 안 해본 것처럼 작고 매끈하니 고운 손이다.
“어...”
그 때 눈에 뜨인 것은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리던 녀석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이었다. 분명 그 자리에 무언가 있었던 것처럼 자국이
남아있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을 올려 녀석의 얼굴을 보니 티비에 집중한 상태다. 물어보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 손가락에
반지자국만 남아 있냐고. 너는 혹시 지금 솔로냐고. 내가 이런 걸 왜 궁금해 하는 거야.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래도 녀석의
왼쪽 손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형~ 일어나~”
차디찬 거실 바닥에 엎어져 자고 있는 나를 깨운 건
선호였다. 부스럭거리며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키는데 스르륵 이불이 내 몸을 타고 떨어졌다. 내가 이불을 덮고 잤던가.
“민우는?”
“어?”
“형 많이 피곤했구나. 민우가 나가는 것도 모르고 잔 거야?”
몽롱한 정신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머리가
무거워 한 쪽으로 기울었다. 선호 집이 낯설어 새벽에 자는 둥 마는 둥 했으니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데 민우는 언제 갔냐.”
“그러니까. 나가는 거도 못 보고 잤어?”
“응. 너 핸드폰 찾으러 가야겠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는 둥 마는
둥 하자 선호가 싱크대로 가 대충 손에 물을 묻혀와 머리를 정리해 준다. 후드점퍼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선호와 함께 집을 나섰다.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렸지만 금세 내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던 이유를 잊어버렸다.
“핸드폰 내가 오전 내내
돌봐줬으니까 한 시간 일해.”
독특한 언어관을 갖고 있는 신혜성. 선호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며 강제로 카운터에 집어넣는다. 어차피
이 시간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되지만 한 시간을 그렇게 넋 놓고 있으라니 생각만 해도 지겨울 거다. 카운터에 남겨진
선호와 잠시 이별의 안녕을 하고 혜성이를 따라 까페 구석진 자리로 가는데 거기에 민우가 있었다. 팔짱을 끼고 머리를 숙이고 있는 엄청나게 불편한
자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보였다.
“야, 그냥 집에 가서 자라니까!”
혜성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녀석이
경기하듯이 몸을 떨더니 고개를 번쩍 든다. 눈두덩이가 퉁퉁 부은 채 반쯤 감겨 이쪽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니 사실
비웃는 걸지도. 녀석이 나를 보더니 손으로 눈을 비비고 미간을 찌푸리고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언제 왔냐.”
“지금.”
“선호는.”
“카운터에 버리고 왔어.”
“형. 카운터 그렇게 아무한테나 맡기지 말라니까. 선호가 아무나는 아니지만
그래도...”
“민우야, 자자~”
민우는 잔소리가 시작되면 1절만도 한 시간인 걸,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민우의 입이 열리면 일단 맥을 끊는 게 우선이다. 비적비적 걸어 민우의 옆자리에 앉아 녀석에게 몸을 기대니 무겁다며 소리를 버럭 지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냥 기대어 비비적대는데 녀석이 앞으로 몸을 빼는 바람에 그대로 털썩 소파 등과 녀석의 엉덩이 사이에 끼고 말았다. 압사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벌떡 일어나자 등받이를 향해 등을 확 부딪치던 녀석이 에이씨- 하며 아쉬워한다. 거의 몸을 뒤로 눕히다시피 기대는데 눈을
내리깔자 민우의 왼손이 또 눈에 들어왔다. 역시. 아까 잘못 본 게 아니야.
“너 반지 끼지 않았어?”
“어? 그러게?
어디 갔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너무 심각하지도 너무 들뜨지도 않은 톤으로. 옆에서 보던 혜성이가 녀석의
왼손을 덥석 잡아 네 번째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우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안했는지 손을 슥 빼버린다.
“잃어버렸어. 어디다
빼놨는데 안 챙겼나 봐.”
“야, 이민우. 너 무슨 일 있지.”
“일은 무슨 일.”
“집에는 왜 안 들어가?”
녀석도 나처럼 엉덩이를 쭉 빼 소파에 몸을 뉘었다. 혜성이가 평소답지 않게 제법 진지한 눈으로 민우를 쳐다본다. 눈치를 보던
민우는 입술을 쭉 빼고는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 말하기 싫다는 오로라를 마구 풍기고 있었다. 혜성이는 결국 녀석 머리에 아프게 딱밤을 먹이고는
일어나 저쪽으로 갔다. 아마 선호가 잘 하고 있는지 살피러 가는 듯 하다. 녀석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게 되자 팔꿈치로 녀석을 쿡쿡 찔렀다.
“왜-”
시큰둥한 대답. 녀석이 스르륵 내게 머리를 기댔다. 툭- 녀석의 왼손이 내 오른손 위에 힘없이 떨어졌다.
손바닥 위에 놓인 녀석의 손을 들자 힘없이 따라 들려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가 이렇게 손을 잡은 적이 있었던가.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눈도
머리 속도 몽롱하기만 하다.
“선호한테 얘기하지 마.”
“뭘.”
“반지.”
“잃어버렸다매.”
“그니까
얘기하지 마. 걔 걱정 한단 말이야.”
“내 마누라가 니 걱정을 왜 하냐.”
“내 꼬붕이니까.”
흠... 들릴 듯
말듯 아주 작게 한숨을 내뱉는 녀석. 선호 말처럼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설마 그 진이라는 놈이랑 상황이 안 좋은 건가. 평소답지 않게 푹
가라앉아 있는 녀석 따라 나도 가라앉아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데 조용했던 녀석에게서 쌕쌕 소리가 났다. 녀석도 밤새 못 잤는지 불편한 자세로도
금세 잠이 들어버린 것 같다. 발소리에 고개를 드니 선호가 살금살금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민우 자?”
“응.”
“어제 여기서 잤다고 형이 투덜대던데.”
“여기서?”
“응. 통 집에 안
들어가는 건가. 안 불편해?”
“괜찮아.”
“민우니까 내 남자 빌려주는 거다.”
수고~ 하며 선호가 다시 오던 길로
갔다. 마침 일하던 알바생도 복학을 이유로 그만 두고 없으니 여차저차 하면 선호가 혜성이의 애절한 부탁에 못 이겨 알바생으로 뽑힐 기세다.
혜성이가 워낙 정직하고 청렴한 선호를 믿는 이유도 있다. 선호는 100원 하나도 정확히 계산할 녀석이니까.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어깨에 놓인
민우의 머리에 머리를 기댔다. 대낮에 따뜻한 까페에서 이런 자세로 이렇게 나른하게 있으려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주
진상이구나.”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뜨니 동완이다. 어쩐지 간밤에 제대로 못 잔 걸 하루 종일 채우는 느낌이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민우도 여전히 꿈나라에서 뛰노는 중인 듯 깨질 않는다. 머리가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뭐하냐, 너네. 애인들 버리고 연애질 하냐?”
“뭐래니.”
“민우가 하나도 안 귀엽다며.”
“누가 뭐래?”
“야- 에릭, 너 요즘 이상한 거 알어?”
“뭐가?”
맞은편에 앉은 동완이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팔에 턱을 괴고는
나와 민우를 번갈아 가며 빤히 본다. 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인상을 쓰자 휘파람을 불어댄다.
“너 요즘 왜 그렇게 민우에
대해서 물어대?”
“내가 언제.”
“너 어제도 나랑 선호 생파 준비하면서 그랬잖아. 진이 어떤 애냐고.”
“그게 뭐.
선호가 자꾸 이 놈 걱정하니까 나도 걱정하게 되는 거지.”
“선호가 이민우~ 이민우~ 노래를 불러도 맞장구 한 번 안치던 니가?”
“야,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성질이 확 나 벌떡 몸을 일으켜 윽박을 질렀다. 그 덕분에 내게 제대로
기대있던 민우가 풀썩 소파에 쓰러졌다. 아차 싶어 녀석을 일으키는데 진짜 뜨겁다. 쓰러지면서 깼는지 몸을 들썩이며 아픈 기침까지 해댔다.
그런데도 눈을 못 뜬다. 놀란 가슴에 녀석을 흔드는데 힘이 하나도 없다.
“선호야! 선호야!!”
목청껏 큰 소리로
급하게 부르자 선호가 파바박 발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뒤따라 혜성이도 머리를 빼꼼 내민다.
“왜, 왜. 무슨 일이야.”
“얘 열 나.”
“어?”
선호가 민우에게 팔을 뻗어 이마를 짚더니 뜨겁다고 어뜩하냐며 호들갑이다. 뒤에 있던
혜성이가 탈의실로 옮기라고 했다. 그나마 거기에 간이침대가 있다며. 그냥 들기는 무거워 업으려는데 동완이가 일어나 팔을 뻗어 내 팔을 잡아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두 손으로 민우를 꼭 붙들고 동완이와 눈이 마주치는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무서운 눈빛이었다. 탁- 선호가 내게서 민우를
데려가 얼른 제 등에 업었다. 그래서 선호가 민우를 업고 혜성이가 받쳐 탈의실로 향하는 걸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동완아.”
“... 왜.”
“나 건들지 마라. 찌르지 마. 그냥 놔 둬.”
“너 내가 선호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내가 고등학교
후배들 중에서 제일 아껴. 선호랑 민우 바다에 던져 놓고 구하라 그러면 선호부터 건질 거야.”
지금 내 표정을 내가 보게 된다면
분명 최악일 것이다. 그 최악의 표정을 지금 유일하게 나를 보고 있는 김동완이, 동완이만이 보고 있다. 동완이가 낸 문제에 난 어이없게도 두
녀석 중 누구를 건져야 할지 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예전에 동완이가 그랬다. 너니까 선호 주는 거야. 민우도 그랬다. 너니까 선호 허락하는
거야. 나니까... 내가 대체 뭐라고. 머릿속에 갑자기 억 만 개의 생각들로 꽉 차 인상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했다. 용량초과. 멀미가
날 지경이다.
“안에는 내가 보고 올 테니까 좀 쉬어.”
다시 털썩 소파에 눕듯이 몸을 기대었다. 동완이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늘어져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녀석, 안 깨네...”
“가자, 선호야.”
“얘 깨워서
집에 보내고 가야 되는데.”
“여기 따뜻하니까. 괜찮아. 난로도 있잖아.”
어서 가자는 재촉에도 고개를 젓는 선호.
혜성이와 선호가 민우에게 붙는 바람에 홀에서의 낮 서빙과 카운터는 나와 동완이가 돌아가면서 해야만 했다. 간간히 혜성이가 나와 살피긴 했지만
선호는 내가 들어갈 때까지 한 번도 탈의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신경 쓰는 건 민우를 걱정하고 있는 선호인지, 이유 모를 이유로 열에 끓는
민우인지... 동완이는 나와 선호를 걱정해서 건넨 말이겠지만 어쩌면 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난 내가 이민우를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 선호의 입에서 수없이 나온 민우라는 이름이 옮은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가게를 일찍 마감하고 혜성이와
동완이를 먼저 보내고는 탈의실로 가 선호를 재촉했다. 그래도 선호는 고집쟁이라 민우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의자에 붙어있는 엉덩이를 뗄
생각을 안 했다. 그럼 나 먼저 간다- 하고 벌떡 일어나니 망설임도 없이 응이란다. 다시 의자에 앉아 녀석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왜 안가?”
“그러는 너는 왜 안가.”
“형...”
“응.”
“나 아까부터 여기서 민우를 이렇게
보는데... 아무래도 진이랑 깨진 거 같아. 반지도 없고 진이한테 문자 보냈는데도 답 없다?”
“......”
“민우가 허세를 좀
떨어서 그렇지. 진이가 첫 남잔데. 민우가 진이 그 새끼 얼마나 좋아했는지... 나는 아는데... 전진 그 새끼는... 그렇게 개지랄
떨었으면서...”
“형이 욕하지 말랬지.”
입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 같아 끊어버리자 쓸쓸하게 살짝 한 쪽 입꼬리가 들려
미소 짓는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아 팔을 잡아당겨 입술로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훌쩍대던 선호는 두 팔로 잠시 나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 떨어져 민우에게 가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아까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비해 핏기가 도는 것을 보니 조금은 나아진 듯 했다.
“민우야, 집에 가자. 가기 싫으면 우리 집이라도 갈래?”
“아니야... 집에... 갈래...”
잠긴
목소리로 뒤척여 몸을 돌리더니 반쯤 감긴 눈만 끔뻑대는 게 깨긴 깬 듯 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보더니 웬 한숨? 내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자
선호가 그제야 걱정에 잠긴 얼굴을 풀고는 큭큭- 웃는 얼굴을 보였다.
“저 화상은 왜 여태 여기 있는 거야...”
궁시렁 대는 민우의 머리를 아프게 찰싹 때리자 더 아프다며 선호에게 징징거린다. 아까는 기절해 있더니 낫긴 나았나 보네. 내
핀잔에 메롱- 혀를 날름 내밀고는 간이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춥다며 점퍼부터 챙겨 입는다.
문단속을 마치고 까페를 나와 선호네
집으로 가는 길로 향했다.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앞서가는 두 녀석을 따르는데 민우가 획 하니 돌아본다.
“넌 왜 따라오는데.
너네 집에나 가라, 쫌..”
“아, 왜.”
“오늘은 내가~ 선호랑 불타는 밤을 보낼 거다. 방해 말고 꺼져. 그치, 선호야~”
민우의 톡 쏘아대는 말투에 선호가 덩달아 끄덕끄덕. 내가 두 사람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 또 금세 큭큭 댄다. 민우는
춥다며 선호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종종 걸음으로 다시 갈 길을 향했다. 어차피 같은 방향이라 따르는데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내내 민우의 구박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