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보리 2015. 4. 6. 01:24

세상은 너로 인해 하얗게 물들고 나의 죄는 너로 인해 사해지니...




#6.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다. 새하얀 타일의 낯선 느낌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과 코끝을 간질이는 시린 내음에 다시 눈을 감았다.


“깼냐. 하루 진종일 자더니만.”


옆에 있는 건지 귓가에서 들리는 익숙한 동완의 목소리에 몽롱했던 잠이 싹 달아났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르도록 숨을 빨아들여 모았다가 한 번에 훅- 하고 내쉬어 바람을 뺐다. 그래도 답답한 가슴은 풀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 민우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끔찍했다.


“괜찮아? 혜성이형도 전화 안 받는다. 이것들이 단체로 잠수 탔나보다.”


민우는 머리를 양 쪽에서 꾹꾹 누르는 듯한 지끈거림에 미간을 찌푸렸다. 꼬르륵- 좀 어이가 없지만 이 상황에도 뱃속에서는 밥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민우는 다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배고프다.”


그리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리자 동완이 입을 벌린 채 잔뜩 놀란 표정이다. 침대에서 내려오려 이불을 걷자 바로 손을 뻗어 말렸다. 덜컹- 옆에 걸려있던 링겔병이 민우의 움직임에 위태롭게 흔들린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갖다달라고 해?”

“아니아니, 나가서 먹자. 병원 밥 싫어.”

“민우야.”


동완은 일부러 계속 눈을 피하는 민우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민우와 눈을 맞췄다. 작은 두 눈에 눈물이 잔뜩 고였는데 떨어지진 않고 입술은 이빨로 자꾸 꾹꾹 깨물어 다 헐어버렸다. 이런데도 자기 마음이 어떤지 말하지 않으려는 거 보면 그 자존심 보통이 아니다. 동완이야 봐왔으니까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미련하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민우는 제 얼굴을 붙잡고 있는 동완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며 침대에서 내려와 섰다.


“내 옷 어디 있어?”

“용희한테는 오랜만에 활동해서 무리하느라 힘들어서 그런 거라고 말했으니까 혹시 물어보면 너도 그렇게 대답해.”


동완은 이래저래 매니저 용희에게 대처해야할 변명거리를 설명해 주고는 제가 쓰고 있던 노란색 캡을 벗어 머리를 가다듬고 민우의 머리에 씌워 푹 눌렀다. 그리고 캐비넷으로 가 민우의 점퍼와 바지를 꺼낸다. 비상벨을 눌러 호출하니 간호사가 금세 와 외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는 동완의 물음에 민우의 팔에 꽂힌 링거주사를 빼주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얼핏 본 민우가 수척한 얼굴로라도 빙긋 웃어주니 얼굴이 새빨개져 버린다.


“우리 나가서 저녁 먹고 올게... 괜찮아... 가서 어딘지 문자 찍어줄게.”


동완은 용희에게 전화를 걸어 외출 보고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연예인이 되면서 하게 된 일상보고는 이제 습관이었다. 그리고 바지를 갈아입은 민우에게 점퍼를 입히는데 쩍 갈라진 민우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나 가수 왜 된 걸까.”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한데 민우는 잠시 잊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 찾게 답해주지 않았다. 민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잘 이끌어 병원을 나서며 큰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는데 멍하니 있던 민우는 뒷걸음질 쳐 바로 뒤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카운터에 앞에 섰다.


“담배 제일 독한 게 뭐에요?”

“네?”


편의점 남자직원이 당황한 듯 되묻자 민우는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담배 진열대를 살펴보다 가장 낯익은 모양의 담배를 손으로 가리켰다. 


“말보로 레드요?”

“주세요, 그거. 라이터도 하나 주세요.”


직원이 가격을 찍으며 가수 민우가 맞냐고 신이 나게 물어 고개를 끄덕이고 사인을 해달라고 해 살며시 미소 지으며 그가 내민 흰 종이에 매직으로 사인을 했다. 민우가 생각지도 않게 선뜻 호응을 해주자 이번에는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민우는 조금 당황스러워 고개를 숙이려는데 그제야 동완이 다가와 애가 아프니까 다음에 다시 올게요 하고는 죄송하다며 민우를 이끌었다. 얼떨결에 만 원짜리 한 장을 덜렁 놓고 담배와 라이터를 가져온 민우는 동완의 손에 의해 길가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에 태워졌다.


“어디 갈까.”

“한식당.”

“거기?”

“응. 거기 갈비찜 먹고 싶다...”


민우는 몸을 동완이 앉은 쪽으로 기우뚱하더니 그 어깨에 기대었다. 아마 지금 같은 상황에 동완이도 없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부들부들 떨며 죽겠다며 한강으로 향했을까. 아니면 술을 진창 마시고 지나가던 아무나 멱살을 잡고 실랑이를 벌이다 피가 터지도록 싸우고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올라갈까. 눈을 감고 무슨 상상을 해도 다 망가지는 것뿐이다.


“일어나, 다 왔다.”


얼핏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걸까. 민우는 동완의 인기척에 눈을 떴고 택시에서 내리니 바로 그 한식당 앞이었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에릭과 함께 왔을 때 접대를 하던 여인이 민우를 알아보고는 웃는 낯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는 얼굴이라 어쩐지 반가운 마음도 들어 인사를 하고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세팅을 하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정미연'이라 쓰여 있는 명찰이 눈에 띄었다. 여태 이름도 몰랐네... 중얼거리던 민우가 세팅을 마치고 나가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네, 뭐 또 필요한 거 있나요?”

“저번에 에릭형이랑 왔을 때요.”

“네.”

“갈비찜 맛있었대요. 그날 밥 먹었어요.”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가 민우의 말에 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연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며 방을 나섰다. 입이 근질거렸던 동완은 문이 닫히자마자 따발총처럼 말을 꺼낸다.


“걔가 먹었다고?”

“응.”

“난 걔 밥 먹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뭐, 억지로 먹이긴 했지만 먹긴 먹었어. 근데 너 걔가 뭐야. 형인데.”

“형은 무슨 얼어 죽을 놈에 형. 너 내가 그...”


동완은 더 말을 이어가려다가 시무룩한 민우의 모습에 거두어 버렸다. 저러다가 또 울지도 못하고 숨 못 쉬고 꺽꺽 댈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찔했다. 동완이 일어나려는데 주머니에서 부스럭 거리며 무언가를 꺼낸다. 담배와 라이터다.


“야, 너 그거 뭐야.”

“보면 몰라?”


필터를 하나 입에 물어 불을 붙이려는 걸 거칠게 빼앗아 버린다. 그래도 민우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무는데 이번에는 입에 문 필터와 담배 케이스 째로 가져가 버린다. 


“언제부터 폈어.”

“지금부터 필거야.”

“등신아, 삽질하지 마. 밥 먹고 으쌰하고 내일부터 다시 일해. 너만 바람 맞고 차이냐? 이게 어디서 신파 찍고 지랄생쇼야.”


동완은 꽤 화가 났는지 씩씩대며 다다다다 말을 이어갔다. 민우의 시무룩한 표정이 좀체 풀리지도 않고 답답함에 가슴까지 주먹으로 한 번 빵- 친다. 그런 민우를 보고 있던 동완은 담배를 버리겠다며 들고는 결국 방을 나섰다. 시간이 조금 지나 멍하니 앉아있는데 다시 문이 열리며 미연이 들어와 작은 그릇을 내민다.


“전복죽이에요. 친구 분이 잠깐 외출 하고 온다고 먼저 요기부터 하고 있으랍니다.”

“감사합니다.”


다 죽어가는 민우의 목소리에 미연은 작게 한 숨을 쉬었다. 그녀가 봐도 안쓰러운지 쉬이 눈을 떼지 못하더니 다기 입을 연다.


“그저께 왔다 갔어요.”

“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에 민우가 놀라 죽을 휘저으며 깨작대던 수저를 놓쳐 달그락 소리가 크게 났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미연에게도 들린다.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자 눈이 민우를 너무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그저께 저녁에 혼자 왔다 갔어요. 술만 마시고 갔고요.”

“에릭형이 왔다 갔다고요?”

“네. 혼자 술만 마시고...”

“......”

“울었어요. 나는 남이라 이유를 물을 수 없었지만 민우군...도 이렇게 힘든 거라면 가서 물어봐요. 왜 그런 건지.”

“... 형이 연락이 안 돼요.”

“그럼 기다려요. 이유가 있을 테니까. 에릭군이... 그렇게 함부로 사람 대할 사람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나는 지켜만 봐도 알겠는데, 아닌가요?”


민우는 한참동안 대답하지 못하고 미연을 보았다. 그리고 곧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푹 숙이자 미연은 다시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후우- 민우는 옅게 한숨을 쉬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입맛이 뚝 떨어져 제대로 먹고 있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고마운 동완이를 생각하며 미연이 기다리라던 그를 생각하며 먹었다.


“괜찮겠어?”

“괜찮아, 금방 들어갈게.”

“이거라도 들고 가. 불안하다.”


동완은 제 휴대전화를 민우의 점퍼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민우의 휴대전화는 숙소에 있기 때문에 가지고 나오지 못했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잠깐 어딘가를 갔다 오겠다는 민우를 혼자 보내려니 마음이 영 불안하다. 오만 원짜리 두어 장을 챙겨주고 택시를 태우고 전화해- 하며 전화하는 시늉을 하고 나서야 민우가 탄 택시가 동완을 떠났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린 민우는 다시 편의점으로 가 아까 샀던 말보로 레드와 라이터를 사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기억을 더듬어 에릭과 함께 갔던 클럽을 찾는데 쉬운 길이라 어렵지는 않았다. 허나 난관은 그게 아니었다.


“회원증 제시해 주십시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민우가 에릭에게 이끌려 갔던 클럽은 회원제라 회원증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워낙 비밀스러운 곳이라 고위 인사층이나 연예인들도 회원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는 거다. 발을 동동 구르던 민우는 급한대로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저... 호스트 중에 진이라고 불러줄 수 없나요? 얼굴만 잠깐 보면 되는데.”

“무슨 일이시죠?”

“에릭 때문에 왔다고 하면... 민우라고... 동생이거든요?”

“죄송합니다. 연예인이라도 회원이 아니면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 여기 놀러온 게 아니라 진이형 잠깐만 보면 된다니깐요.”


언성이 높아져 경호원들의 제지가 살벌해졌다. 에릭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하고 온 마지막인데, 만나보지도 못하고 쫓겨나게 생겼다. 민우는 하는 수 없이 진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기 위해 클럽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 계단에 주저앉았다. 경호원이 슬쩍 그를 보더니 이내 모르는 체 한다. 진의 번호는 어차피 제 휴대전화에 있어서 가지러 가는 동안 시간이 다 갈 것 같고... 민우는 버려진 강아지처럼 마냥 입구 쪽만을 보며 기다리지만 시간은 기약이 없었다.


“민우야-”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민우가 자리를 뜰 기미가 안보이자 경호원은 결국 슬쩍 안쪽의 웨이터를 불러 민우의 존재를 알려주고 진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민우라는 말에 금방 클럽에서 튀어나온 진은 민우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달려갔다.


“왜 이러고 있어, 혼자.”

“형, 에릭형이랑 연락돼요? 아니면 혜성이 형이라도...”

“왜, 에릭이랑 연락 안 돼? 혜성이는 연락 안 해봤는데...”

“에릭형 전화번호 없앴어요.”

“뭐?”


민우의 말에 진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에릭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없는 번호라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놀란 가슴에 민우와 휴대전화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요. 답답해 죽겠어.”


시무룩한 민우의 어깨를 다독이며 클럽 안으로 이끌었다. 그제야 굳게 닫혀있던 클럽의 문이 경호원들에 의해 열렸다.


“오늘이랑 내일 바꾼다고 매니저한테 말해주고, 오늘 오는 손님들 다 캔슬해줘.”

“네.”


진의 말에 경호원은 최대한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 민우는 조금 겁이 나 진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따라 들어간 곳은 작은 룸이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테이블에 놓인 컵에 물을 따르고 얼음을 담아 민우에게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아 들고는 꼭 쥔다.


“난 에릭 스캔들 터진 거 너네 연막인 줄 알았어.”

“여기 안 왔다 갔어요?”

“그저께 밤에 바쁘니까 한동안 못 올 거 같다고. 보고 싶어도 참으라고 장난식으로 문자 와서 드라마 때문인가 했지.”


그런데 왜 저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민우는 속이 바짝 타들어가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진은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푹- 쉬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뱉는다.


“밥은 먹었어?”

“네.”

“잠은 좀 잤고?”

“네.”

“착해라.”

“......”

“조금만 기다려 봐. 에릭이 날라리 같아도 사랑하는 사람한테 이럴 정도로 나쁜 애 아니야. 분명 사정이 있을 거야. 혜성이도 잠수 탔으면 무슨 일 있는 거 맞아.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니가 흔들리면 에릭이 돌아올 곳이 없어.





발끝엔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민우는 마지막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나서야 바닥을 보았다. 처음 그를 만났던 골목. 그곳은 여전히 가로등이 제대로 켜있지 않아 어두웠고 사람도 다니지 않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흑...”


마지막 한 개비가 다 타고 그대로 주저앉아 생각에 잠기자 서러움이 밀려와 민우를 감싸 안았다.

이유야 어떻든, 무슨 일이 있었든 아무 상관없어.

당신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지금 이순간이 숨을 쉬지 못할 때보다 더 고통스러워.

그제야 밀려온 서러움아 북받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소리가 새어나갈까 입을 틀어막아보지만 쏟아지는 눈물은 고장난 수도처럼 쏟아지기만 했다.


“으윽...”


사랑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말라고 해놓고... 차라리 독한 말이라도 했으면 미워했을 텐데. 조금이라도 나쁜 사람이었으면 그저 놀아났을 뿐이라고 웃으며 툭툭 털고 일어날 텐데. 바보 같이 착한 사람이라서 저만 사랑한다고 저만 바라본다고 믿어버리게 만들어서.

민우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쿵쿵 쳤다. 숨이 꽉 막혀 뛰지 않는 심장이 저를 너무도 괴롭혔다.






침대에서 일어나 한참동안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그와 극장에서 키스를 하던 그날의 꿈을 꾸었다. 너무도 아련하고 마치 없었던 일 같아서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한다~”

“뭐가?”

“누나 에릭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오늘부터 드라마 하잖아.”


민우가 코디인 지혜에게 휴대전화를 들어 떡하니 에릭이 보이는 화면을 눈앞에 보여줘도 입술만 삐죽거릴 뿐 영 무관심이다. 아니, 오히려 치우란다.


“쳇, 품절남 관심 끝. 그것도 장하연? 에라이-”


민우는 괜스레 무안함에 휴대전화를 제 눈앞으로 가져왔다. 저를 보지 않는 작은 화면 속의 남자는 너무도 이질적인 느낌이다.


“야, 그 드라마 여주도 장하연이지? 어이가 없다.”

“그치, 이 여자 연기 진짜 못한다며.”

“그러니까. 에릭도 뭐가 씌인 거지. 라이벌 회사라도 사장 딸이면 좋다 이거야?”


지혜의 불평에 민우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힐끔거리며 민우의 DMB를 보던 지혜는 고대기로 민우의 머리를 깔끔하게 피며 다시 입을 연다.


“너 친하다면서 뭐라고 좀 해봐.”

“그게... 여친 생기니까 쌩까네?”

“진짜?”

“응, 진짜.”

“야, 에릭 그놈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완전 나쁜 놈이잖아.”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민우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작은 화면에 집중했다. 드라마는 막 시작을 알렸고 오프닝인 듯 예상이 되는 멋있는 장면들이 화면을 꽉 채웠다. 그 때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낯익은 얼굴을 한 스텝이 불쑥 들어와 민우는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고 으레 짓던 웃는 낯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민우씨, 오늘도 잘 해줘. 개편 때 민우씨 고정 내가 위에다 푸쉬해 줄테니까.”

“네, 누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디오 메인 작가쯤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민우는 애교스럽게 합장을 하며 꾸벅 머리를 조아리자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2주 전 민우는 라디오에 나와 한 청취자의 사랑 고민이 들어있는 사연을 읽고 꽤 길게 조언해 줬는데, 그게 반응이 좋아 고정요청이 쇄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방송은 꽤 중요하다. 게다가 보이는 라디오라 약간의 분장을 마치고 지혜에게 휴대전화를 넘기고 스튜디오로 향한다.


“끄지 말고 보고 있다가 어땠는지 말해줘.”

“연락도 안 된다면서. 나보고 이 녀석이 다른 여자랑 꽁냥거리는 걸 보고 있으라고?”

“에이- 누나, 알았지?”


드라마를 끄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당부해 지혜는 하는 수 없이 작은 화면 속의 에릭을 감상해야만 했다.


“아, 그 자식 진짜 잘생기긴 잘생겼네.”


민우는 알고 있었을까. 드라마 속 에릭의 이름은 민우였다. 상대배우가 에릭을 민우라 부르는 소리에 놀라 스튜디오로 눈길을 주지만 안쪽에서의 방송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지혜는 나오면 얘기해줘야지 하며 드라마에 집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놓지 마.」




“어, 왔어?”

“잘 하고 있어?”


동완이 들어서자 용희가 제일 먼저 반겼다. 턱짓으로 방송이 진행되고 있는 스튜디오를 가리켜 시선을 주자 민우가 연신 웃는 얼굴로 DJ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동완이 왔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양손을 좌우로 빠르게 흔들며 반가움의 인사를 해 동완도 '잘해'하며 입모양으로 민우를 격려했다.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용희가 팔짱을 끼며 동완에게 말을 건넸다.


“민우, 처음 활동할 때는 신이 나서 날아다니더니 요즘은 웃는 게 통 웃는 게 아닌 거 같아.”

“민우가?”

“응. 티 안내려고 무지 노력하는데 내가 모르냐? 자기랑 밥 먹은 게 얼마고 챙긴 게 얼만데. 넌 뭐 들은 거 없어?”

“그냥 그래. 나라고 뭐 말 하나.”


동완은 이유를 알지만 꺼내기도 뭣해 어깨만 으쓱했다. 누가 봐도 창백한 얼굴인데 눈치 백단인 용희에게 역시 들키지 않을 리가 없다.


“그 때 아프고 나서 한 달 내내 저러니까 참 보기 안쓰럽네. 그렇다고 잘 되고 있는데 갑자기 활동을 접을 수도 없고.”

“오늘 또 일위 했어?”

“응.”

“보고 있겠네.”

“뭐?”

“아냐-”


용희와 동완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민우는 의자에서 일어나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섰다. 제 머리통만한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음향 조절을 위해 기계를 몇 번 슥슥 만지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릴 듯 말 듯 눈물이 가득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It is not true, 우리가 헤어진단 말

It is not true, 그에게 돌아간단 말

It is not true, It is not true, It is not true


동완은 민우가 정규 1집 준비를 위해 받은 곡 중 유난히 마음에 들어 하던 노래를 떠올렸다. 가사가 너무 절절하다며 꼭 앨범에 넣고 싶어 했었다. 얼마 전부터 노래연습에 푹 빠진 민우는 이 노래가 이러려고 나한테 왔나라며 한숨을 쉬더니 그 노래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기어이 여기서 부르려고... 


Cry me a river, Cry me a river 나의 눈물로 흐려져만 가고

Cry me a river, Cry me a river 난 무너지는데

Cry me a river, Cry me a river 빗물에 내 눈물은 흘러가고

Cry me a river, Cry me a river, Oh no


돌아서버린 너의 뒷모습마저 불 꺼진 쇼윈도에 모두 사라져가고 너와 함께 했던 밤 잊으려 해


보는 이도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목이 메는가 싶으면서도 민우의 노래는 끊이지 않았다. 아마 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었을 거다. 듣고 있다면 들려주고 싶었을 거다. 제 마음을. 악착같이 불러 말하고 싶었을 거다. 누구보다도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나 그냥 에릭형 기다릴래. 일 년, 아니 그냥 딱 한 달만이라도 기다려 볼래. 사정이 있을 거라고 말해줄 거야. 미안하다고. 그 사람 나 함부로 버리고 그럴 사람 아니란 거... 동완이 너도 알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한 번 쯤은 다시 사랑해 달라고 애걸복걸 해도 되지 않겠냐고 민우는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답답하다. 사랑이 뭐라고.


무사히 노래를 부르고 방송을 마친 민우는 스튜디오를 나서자마자 동완에게 다가가 부리지도 않던 애교를 부리며 동완의 등에 머리를 부볐다. 훌쩍- 그럼 그렇지. 목소리에 눈물이 가득 찼다 생각했는데 울고 싶은데 울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했을까. 동완은 잘했다는 뜻으로 팔을 뻗어 민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훌쩍이는 소리는 모른 척 했다.




화장실에 들렀다 가겠다며 동완과 동료들을 먼저 보낸 민우는 터덜터덜 비상계단을 내려갔다. 우울한 노래를 괜히 불렀다 싶은 게 가라앉은 우울함이 풀리지 않는다. 동완이 잘했다고 토닥이며 위로를 해주는데 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두층 정도 더 내려갔다 싶을 때 계단 아래쪽에 웅성거림이 들렸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의 소리라 아래쪽을 힐끔 거리자 많은 기기와 방송국 스텝 점퍼가 눈에 띄어 촬영이라도 하나 싶어 내려가는 속도를 붙였다. 


“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진다. 그다. 한 쪽 귀에는 이어폰을 낀 그가 복도 벽에 기대어 어디를 보는지 모르게 멍하니 서있었다. 계단 위쪽에서의 인기척을 느낀 것일까. 민우가 어찌할 새도 없이 고개를 들었고 결국 눈이 마주쳐 버렸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난간에 겨우 몸을 기대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역시 한참을 쳐다보다 다가오는 인기척에 결국 시선을 돌렸다. 장하연이 시야에 들어와 민우는 그제야 두 발을 떼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기 무슨 일이야? 누구 있어?”

“아니야, 아무 것도.”


발길을 돌려 왔던 길로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비상문이 나와 빠져나갔지만 여전히 뛰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저는 이제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제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고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해 온다. 


“하... 이민우... 진짜... 미쳤냐...?”


그래도 까칠해진 것 같은 그의 얼굴이 떠올라 걱정이 된다. 조금 길어진 머리.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푸석푸석해진 얼굴. 가느다란 손. 하얀 이어폰. 순간적으로 본 것임에도 그의 얼굴이 너무도 또렷하게 각인되어 버려 지울 수가 없다. 너무나 우습지만 그의 하나하나 모습에 마냥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