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민 : Blind love (완)

Blind love 7 (완)

신화보리 2015. 4. 6. 01:25

너라면 내 모든 것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7.



“어디 갔다 이제 와?”


민우는 벤에 올라타자마자 지혜가 구박할 새도 없이 피곤해서 자야겠다며 의자를 뒤로 젖혔다. 뒷자리에 앉은 동완도 이미 팔짱을 끼고 잘 태세다. 지혜가 부산스럽게 민우를 툭툭 쳐 민우는 인상을 쓰며 지혜에게 눈을 돌렸다.


“야, 너 알고 있었어? 에릭 드라마 속 이름이 민우야.”

“어?”

“신기하지. 그리고 각본에 에릭도 참여했다더니 멋있는 대사가 술술 나오더라. 뭐라더라, 나를 놓지 마?”

“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놓지 마... 아, 뭐였지?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다.”

“... 에이, 몰라. 잘 거야. 도착하면 깨워.”


민우는 괜히 두근거리는 게 무안해 다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 사람이 그렇게 애절하게 했던 말을 드라마에서 다른 사람에게 하다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뭐야, 한참 찾았잖아.”


멍하니 벽에 담배를 피우던 민우는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라 필터를 바닥에 던졌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인영은 다름 아닌 전진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머리를 굴려보지만 도저히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에릭과 만났던 골목길은 몇날 며칠을 서있어도 누구 하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인데, 진이 저를 찾아온 것이 그저 꿈처럼 신기하기만 하다.


“진짜 얼굴이 엉망이네.”

“형, 무슨 일이에요.”

“세상에, 이거 다 니가 핀 거야? 에릭 때문에 매일 여기서 담배 피고 울고?”

“......”

“니가 이러면 어떡해.”

“... 혹시 형이랑 연락 되요?”


진을 붙잡고 묻자 더 이상 말이 없다. 두근두근, 그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진이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들어 통화버튼을 누른다. 저를 잡던 민우의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을 느끼며 흔들리는 민우의 눈동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응, 잠시만.”


그리고 민우에게 휴대전화를 넘기는데 민우는 달달 떨리는 손을 뻗어 진의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민우야?]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아니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빌었던 순간이다. 민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 수화기 너머로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물 한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턱 끝에 맺힌 눈물방울은 마치 벼랑 끝에 놓인 모습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턱 끝의 떨림에 작게 한숨이 나와 수화기 너머로 흘러갔다.


[민우야...]

“......”

[나 믿어줘.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지?]

“......”

[이제 다 됐어. 조금만... 꼭 돌아갈게.]

“형...”

[응, 민우야.]

“숨을... 못 쉬겠어요...”

[나도 그래. 하지만... 민우를 위해 내가 할 일이 있었어. 민우 아프게 한 거 앞으로 다 갚을게.]

“... 사랑해.”

[사랑해.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슬픈 노래 부르지 마.]


무너지듯 주저앉는 민우를 진은 겨우 붙잡아 달랬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할 것 같아 휴대전화를 건네받으며 민우를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통화할 것을 약속하고 종료버튼을 눌렀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는데 민우는 이미 너무 엉망이다.


“형... 형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말해주면 안 돼요?”


애원해 보지만 진은 말없이 민우를 안아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민우는 한참동안 진에게 안겨 소리 내어 울었다. 언제쯤 이 눈물을 멈추고 웃을 수 있을까. 너무 멀고 다가오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민우야, 다 왔어.”


진은 손을 뻗어 옆자리에 있는 민우의 어깨를 톡톡 쳤다. 에릭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며 한참을 울던 민우는 차에 태우자 거의 지친 채 잠이 들어버렸다. 민우의 숙소의 위치를 에릭에게 물어 문자를 받고 차로 10분쯤을 달리니 가까운 곳에 민우의 숙소가 있었다. 진의 인기척에 눈을 뜬 민우는 스르륵 눈을 뜨더니 낯익은 창 밖 풍경에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숙소야.”

“어떻게.”


진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자 민우는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시 의자에 깊게 몸을 묻고 진의 눈치를 살피지만 역시나 에릭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민우를 살피던 진은 조수석 앞에 놓인 공씨디 케이스 하나를 민우에게 건넸다.


“뭐에요?”

“보면 안대.”

“에릭형이 주는 거예요?”

“응.”


에릭이 줬다는 긍정적인 대답에 민우는 어린 아이가 선물을 받는 것처럼 두 손으로 공손하게 케이스를 받고는 가슴에 꼭 안았다. 그리고 다시 진을 쳐다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처럼 민우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린다.


“형, 에릭형은 잘 있죠?”


진은 한참동안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런 대답에 민우가 세상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하는 걸 보니 거짓말이라도 할 걸 그랬나 생각했지만, 진이 본 에릭의 모습은 그런 거짓말을 할 수도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마치 산송장을 보는 느낌이랄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리고 남에게 머리 한번 조아릴 줄 모르는 그가 도와달라고 했을 때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에릭은 나랑 혜성이가 계속 만날 수 있게 도와줬어.”

“......”

“난 내가 하찮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혜성이가 날 너무 잘해주니까 부담스러웠거든. 내가 혜성이를 만나지 않으려고 할 때마다 에릭이 찾아와서 혜성이 죽는다고 난리다 어쩔거냐 책임져라 하면서 어떻게든 만나달라고 그랬었어.”

“형은 왜... 그 일 그만 안 둬요?”

“약속했거든.”

“어떤 약속이요?”

“나 빚 다 갚고 돈 조금 모이면 시골 가서 봉사활동 하자고. 하늘이 맺어준 우리 인연 갚으면서 살자고.”

“멋지다...”

“혜성이는 모델 일 흥미도 없었고 그만 두려고 했었대. 그런데 나 만나고 악착같이 돈 벌어서 나 빼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 처음에는 한두 푼이 아니라 절망했지만 그렇게 노력하니 모델로도 성공하고 연기자로도 나아가려고 하니까. 그래서 내가 녀석... 인생에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해서 그만 하자고 하니까 뭐라는 줄 알아?”

“뭐라는데요?”

“한낱 연예기획사 양아치 나부랭이 3류로 살다 막 갈 인생이었는데 나 때문에 꿈도 생기고 목표도 생겼는데 그걸 어떻게 놓냐는 거야.”


핸들에 턱을 기대어 지난날을 회상하며 낮게 읊조리는 진의 옆모습은 어찌 보면 아름다웠다. 비상계단에서 봤던 에릭의 초췌한 모습이 떠올라 잠시 울음을 삼켰다. 그에게 꿈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심장조차 뛰지 않던 그에게 희망은 보였을까.


“에릭도 목표가 생긴 거야. 자기 인생이야 어떻게 굴러가든 상관없던 녀석이.”

“네?”

“민우, 너. 난 그래서 그때 날 도와준 에릭을 이렇게 돕고 있는 거고.”


민우는 차에서 내려 진에게 안녕을 고했다. 더 이상 묻지도 않았고 이야기 해주지도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그 말 한마디로도 십년은 버틸 수 있다고 자신해 본다. 그 때 출발하려던 진이 다시 차창문을 열고 민우를 불러 세웠다. 길 건너로 가려던 민우는 다시 허리를 숙여 차 안의 전진과 눈을 맞췄다.


“에릭이 전해달래.”

“네?”

“이민우, 고마워.”

“......”

“난 전했다.”


가슴이 벅찬다는 말이 이런 느낌일까. 민우는 들고 있던 씨디 케이스로 제 얼굴을 가리며 진에게 어서가라고 재촉했다. 진의 차가 떠나고도 한참동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디 갔다 이제 와.”

“어, 누구 좀 만나고...”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온 민우를 걱정스레 보고 있던 동완이 거실에 펼쳐놓은 이불꾸러미를 안고 질질 끌며 방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동완아.”

“왜.”


조금 쌀쌀맞은 동완의 대답에 민우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저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닌 동완일텐데. 그래도 동완에게는 이 기쁜 소식을 꼭 알려줘야 할 것 같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에릭형이랑... 통화했어.”

“... 뭐? 뭐라그래? 그 새끼가!!!”


이놈 저놈 욕해도 동완 역시 그를 걱정하긴 마찬가지였다. 방송을 앞둔 드라마 촬영 때문에 출퇴근을 하다 보니 에릭의 얘기도 여기저기 들려올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안방극장 데뷔는 그의 연기력과 유명세 그리고 실제 연인과의 호흡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하게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하락세를 탔고, 점점 드러나는 장하연의 연기력 논란으로 덤으로 그의 공식연인인 에릭까지 이미지가 추락해 가고 있었다. 민우가 모르진 않겠지만 굳이 그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뭐라는데?”

“기다려달래.”

“말이 뭐 그래.”

“조금만 기다리면 돌아온대. 미안하대. 고맙대. 슬픈 노래 부르지 말래.”

“그 노래 부른 거 들었대?”

“응. 그런 거 같아.”

“그 새끼...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면... 못 참고 전화했겠나.”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켜고 씨디 케이스를 열었다. 컴퓨터가 켜지는 시간도 오늘은 억만년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CD를 꽂고 폴더를 열자 동영상 하나가 자리하고 있어 클릭했다. 어둡고 거친 영상이 민우의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열여섯의 에릭이 상처로만 가득한, 지금과는 너무 다른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느껴지는 공허함이 정말 심장이 없는 사람 같다. 컷터칼로 거울을 보며 제 얼굴을 그으려는 장면에서는 저절로 눈이 감겼다.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너무 아픔이 많아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것이 느껴졌다. 

30분 남짓의 짧은 영상을 겨우 보고 나서야 모니터 옆에서 민우를 지켜보고 있는 함께 찍은 사진을 들어 눈앞에 가져왔다. 에릭과 민우 둘 다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이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지만 나중에 돌아오면 왜 그랬는지 따져야지.


“보고 싶다...”


그리고 키스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줘야지. 껴안고 푹 자야지. 그 때는 영원히 나를 혼자 두지 말아달라고 꼭 말해야지.




모처럼의 휴가라 침대에 대자로 누운 채 꼼짝도 않던 민우는 갑자기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찾았다. 침대에서 나가기 싫은데... 소리가 나는 곳을 찾으니 책상이어서 귀찮은 마음에 그냥 받지 않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멈췄던 휴대전화는 금세 다시 울렸고 못이기는 척 벌떡 일어나 확인하자 동완이다.


“어, 왜.”

[야, 너 얘기 못 들었어?]

“어? 뭐가?”

[얘가 지금... 빨리 인터넷 들어가 봐.]

“아, 왜. 무슨 일 있어?”


민우는 느릿하게 컴퓨터 전원을 누르며 동완의 말에 대꾸를 했다. 동완은 도통 시원하게 말하질 않고 미치겠다며 중얼거릴 뿐이다.


“무슨 일인데.”

[검색어 1위.]

“그게 뭐.”

[에릭 은퇴 기자회견.]


동완의 말에 화면이 켜진 모니터를 한참 쳐다보다 마우스를 클릭하려는데 떨리는 손이 자꾸 헛짚어 인터넷 창이 클릭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천천히 인터넷창을 클릭하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검색어 순위. 1위는 동완의 말대로 '에릭 은퇴 기자회견'이라 자리하고 있었다. 저를 위해 해야 한다는 일이 이거였나.


[민우야.]

“......”

[아직 기자회견은 안했고 이따 청담동에서 7시에 한다고 기자들한테 공문만 보냈나봐. 나 여기 촬영장도 난리다. 야, 괜찮아? 말 좀 해봐.]

“보고 있어.”

[그래.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삽질하지 말고. 알았지?]

“응.”


충격의 연속이다. 얼마 전에는 이름도 잘 모르던 여자와 스캔들을 터트리더니 이젠 은퇴설이다. 민우는 머릿속에 뒤엉킨 혼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급한 대로 전진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7시를 향하는 시간은 천근만근 더디기만 했다.


‘지금부터 저희 소속사 직원인 에릭씨의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참석하신 기자 여러분의 질문은 받지 않을 것이며 에릭씨의 성명발표로 대신하겠습니다. 에릭씨 일어나서 인사해 주세요.’


톱스타의 갑작스런 은퇴이니만큼 기자회견도 인터넷에서 생중계로 이뤄졌다. 기자회견장에는 터질듯이 기자들이 깔려 있었고 그들의 비명에 가까운 질문들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회자로 보이는 남자는 ‘장내가 소란스러우니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멘트를 녹음기처럼 내뱉었고 A4 용지만한 크기의 파일을 들고 있는 에릭을 향해서는 끊임없이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던 그는 장내가 점점 조용해지자 마이크를 조심스레 들어 제 입가에 갖다 댔다.


‘먼저 갑작스런 공문에도 자리에 참석해주신 기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민우는 저도 모르게 잘근잘근 씹던 입술이 결국 터져 피가 난 것을 느끼고 나서야 못된 버릇을 멈췄다. 에릭은 며칠 사이에 더 핼쑥해져 보는 이마저 안타깝게 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거칠고 갈라진 입술은 피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은 제 은퇴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Q엔터테인먼트 장하연양과의 스캔들 이후라 더 갑작스럽겠지만 제가 이렇게 큰 결심을 한 이유는 이제 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행복한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저의 어둠을 발견하신 분이 있다면 아마 그게 제 진짜 모습일 것입니다. 행복하지 못했던 유년시절과 배우 생활 모두 저에겐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어둠이라 버거울 뿐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든 걸 놓기로... 지금 소속사 사장인 형과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깨닫는 날, 그날이 계약 만기라고. 그래서 마련하게 된 오늘 이 자리는 그 사람을 위해 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입니다.

저에겐 장하연양이 아닌 진심으로 저의 어둠을 달래줄 빛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지금 그는 저 때문에 너무나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을 놓고 그 사람과 함께 하려 합니다.

결심을 하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행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5년간 배우로서의 저는 행복했고 은퇴를 결심하기까지 많은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 것이며 여러분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받은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저의 결심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와 소속사의 계약은 오늘로 파기가 되며 파기에 따른 보상금은 약관대로 시행됩니다.

Q엔터테인먼트와 장하연양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



시작 전보다 더 정신없게 플래시가 터진다. 다시 기자들을 향해 꾸벅 인사한 에릭은 또 할 말이 있는지 마이크를 든다. 그리고 이어진 에릭의 마지막 말에 민우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우리 처음 만난 곳에서 기다릴게.’


모든 것을 놓기까지 혼자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아파했을까.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눈물을 닦으며 재킷을 입고 부리나케 집을 뛰쳐나왔다. 오늘따라 더딘 택시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며 결국 뛰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입술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새어나온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뛰던 발을 멈추고 느릿하게 한발 한발 나아갔다. 조금만 더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해는 어느 새 모습을 감춰 어두웠고 길거리에는 밤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제 갈 곳을 향해 걷고 있다. 떨리는 마음으로 걸음을 내딛는데 골목에 다다르자 갑자기 어둠 속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와 민우를 잡아 당겼다. 어둠에 보이지 않았던 시야가 점점 걷어지자 흐릿하게 익숙한 형상이 보였다.


“...형?”


대답 없이 민우에게 찰싹 붙어 서서는 민우가 꼭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가져가 번호를 누른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그의 뒷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에서 민우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민우의 손에 쥐어 준다.


“문자하면 답문도 주고 전화하면 받아.”

“......”

“응?”

“이렇게 작업 걸면 몇 명이나 넘어와요?”

“음... 한명만 넘어오면 되는데.”

“누구?”


씩 웃던 얼굴이 민우에게 다가와 입술에 쪽- 소리를 내고는 떨어졌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본 게 오랜만이라 어쩐지 감격스럽다. 


“역시 보고 있었구나.”

“응. 왜 그랬어.”

“나중에... 나중에 다 얘기해 줄게.”

“나도... 그만 둘까?”

“아니. 난 민우 노래하는 게 좋아. 계속 노래해줘.”

“그러면 형은 왜 그만뒀어.”

“너를 담기 위해... 다 놓기로 했어.”

“......”

“그러니까 민우야, 날 놓지 마. 너마저 날 놓으면 난 정말 아무 것도 없게 돼.”


민우는 두 팔로 에릭의 목을 꽉 껴안았다. 할 말이 너무도 많지만 지금은 곁에 있다는 걸 느끼고 싶다. 등 뒤로 느껴지는 에릭의 두 팔이 따뜻하다. 







너만은 모르길 바랄 뿐...


#12.


Epilogue 1. 에릭문, 이민우에게 첫눈에 반하다.


“너 이번 드라마 진짜 망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에이, 그만해- 첫 드라만데 그렇게 부담 주지 말아라.”

“에릭아, 나 좀 봐줘!!”


대표인 종현의 절절매는 모습에 에릭은 재밌는지 연신 큭큭 댄다. 어린 시절 방황하던 자신을 연예계에 입문시키고 이만큼 키워놓은 사람인데 가끔 이렇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면 어쩐지 장난기가 발동해 버린다. 더 아부해 보라는 에릭의 말에 종현은 멱살을 잡을 기세다. 그렇게 재밌게 담소를 나누는 중에도 익어가는 곱창을 젓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기다리는데 늘 사람이 없던 곱창집에 갑자기 다섯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사내가 한꺼번에 들어와 부산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이민우 1집 대박을 위하여-”


그런 테이블이 들어오면 소란스럽기만 하지 그들이 누군지 왜 왔는지는 사실 관심이 없다. 그 쪽 역시 이쪽 테이블에 에릭이 앉던 누가 오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에릭 그가 여기를 자주 찾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유난히 귓가를 파고드는 이민우라는 세글자에 귀가 쫑긋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오늘 낮에 검색어에 계속 올라 클릭해서 봤던 기사의 주인공이 방금 비장한 멘트를 외친 것으로 보였다.


“옆에 봐봐.”

“응?”

“이민우래.”

“나도 들었어, 임마. 연예인 처음 보냐.”


종현에게 보라며 눈길을 돌리는데 그 주인공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저쪽은 무심결에 마주친 에릭의 시선에 놀랐는지 고개를 돌려버린다. 어쩐지 웃음이 나와 계속 쳐다보니 금방 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아 한참동안 쳐다보다 미간을 찌푸리기에 피식 웃어버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버린다.


“뭘 또 그렇게 실실대.”

“아니, 여기를 이러고 쳐다보잖아.”

“별 게 다 웃기다, 임마.”


에릭이 본 것을 그대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흉내 내자 종현이 기가 차다는 듯 웃는다. 에릭은 방금 보게 된 민우의 모습이 어쩐지 눈앞에 아른거려 종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그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시선이 부딪히지 않았다.


“그런데 쟤 오늘 앨범 처음 나온 거라던데 호텔 같은데서 파티 안하고 이런데서 하냐.”

“소박한 거지. 너도 좀 보고 배워라.”

“내가 뭘~”

“초심을 잃었어, 초심을.”

“나 초심으로 돌아가면 끽-”


에릭이 손등으로 얼굴을 긋는 시늉을 하자 종현이 아차 싶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난다. 쳐다만 봐도 살벌한 칼로 얼굴을 그으려던 어린 아이. 지금이야 저렇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 때의 그는 너무나 절박해 말리지 않으면 그 원망에 가득한 얼굴이 머릿속을 따라다녀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나 담배 좀 피고 올게.”

“그냥 여기서 피워.”

“술 안 깨서 바람 좀 쐬게.”


에릭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가게를 나섰다. 한두 번은 아닌 듯 망설임도 없이 가로등도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 담배 필터를 하나 물고 가게 벽에 기대어 섰다. 달빛조차 들지 않아 눈앞의 연기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두 번째 필터를 다 태울 때쯤 들어선 골목 끝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휴대전화를 유심히 살펴보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이민우...?’


짙은 어둠 속에서 오로지 휴대전화 액정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을 의지해 희미하게 보이는 민우의 엷은 미소는 에릭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를 잘 아는 건 아니다. 오늘 심심해서 웹서핑을 하다가 포털사이트 메인기사가 뜨길래 봤을 뿐이고, 기껏해야 오다가다 보게 되는 음악프로그램이나 광고에서 보이는 인위적인 모습 말고는 볼 일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만날 일도 관심가질 일도 특별히 주목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는 너의 엷은 미소는 왜 두근거리게 하는 걸까.


휴대전화 액정이 꺼지며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아 성큼성큼 다가가 팔을 잡아당겨 자신이 있던 어둠 속으로 이끌었다. 상대는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휴대전화 액정을 켜 비춘다. 너머로 보이는 흔들리는 눈빛이 다시 맞게 된 어둠에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그를 붙잡을 말이 필요하다. 머리를 제법 굴리던 에릭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웃어서 기분 나빴어요?”

“......”

“귀여워서 웃은 건데.”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Epilogue 2. 비밀


“무슨 일이야.”


막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 종현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어두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무실로 한걸음에 달려오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종현의 책상 위에 어지럽게 펼쳐져있는 사진들이었다. 

에릭과 민우가 아무도 없는 방송국 대기실에서 키스하는 사진, 함께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 함께 나오는 사진 등등...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종현이 한참동안 말이 없다 벌떡 일어나 사진을 냅다 에릭에게 던졌다.


“방송국에서 도대체 뭐하고 다니는 거야! 이것들 다 Q엔터에서 온 거야!!”


다시 의자에 앉더니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고는 깊은 한숨만 쉰다. 에릭은 사진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동안 말없이 서있기만 했다.


“너 얘랑 놀아나고 있었어? 그동안 얘 꼬시고 있었던 거야?”

“......”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

“너 그동안 이 여자, 저 남자 다 건드리고 다닌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아? 그래도 조심하고 있어서 터치 안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방송국에서까지...”

“사랑하고 있어.”

“뭐?”


종현은 에릭의 낮은 목소리에 놀라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진에 손을 뻗은 채 집어 들지는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눈에 들어왔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꽉 깨무는 모습이 억울한 일을 당한 꼬마아이 같다.


“사랑해.”

“야...”


순간 벌떡 일어나 손을 뻗어 비틀거리며 무너지려는 에릭의 팔을 잡아 힘을 주었다. 정말 쓰러지겠다 싶어 소파에 앉혔는데 그대로 스르륵 의자에서 내려와 종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올려본다. 늘 당당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의 눈동자는 두려움에 휩싸여 초점을 잃었다.


“그렇잖아, 형. 내가 아무리 망나니라도 방송국에서 그러는 거 봤어? 스캔들 안내려고 밖에서 원나잇하고 끝이잖아. 형이 더 잘 알잖아요.”

“야...”

“근데 얘는 자제가 안 돼. 하루라도 안보면 미칠 거 같아. 보고 있으면 숨이 막혀서 자꾸 안고 싶고 만지고 싶어.”

“진심이야?”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연예계 쪽에서는 암암리에 소문이 난 그가 밖으로 더 이상 퍼지지 않은 건 철저한 자기관리 때문이었다. 누구든 그런 그를 폭로할 만도 한데 워낙 깔끔하다보니 입 여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에릭이 이런 모습으로 어린 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다. 벼르고 벼르다 결국 일이 터졌다는 생각에 크게 혼이라도 내야지 싶었는데... 종현은 가까운 소파에 앉아 몸을 깊게 묻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형... 사진... 우리한테만 온 거야...?”

“몰라.”


에릭 역시 무릎을 꿇은 채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한 가지 말고는 더 이상 답이 나오질 않는다. 다른 때는 잘 돌아가는 머리가 왜 지금은 이렇게 정지 상태인지 이해가 안 간다. 에릭은 다시 종현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다.


“Q엔터에서 하라는 거 다 해줘.”

“뭐?”

“대신 민우 쪽에서는 모르게 해야 돼.”

“너 미쳤어?”

“미치겠어...”

“......”

“이걸... 민우가 알게 될까봐... 무서워...”

“지금 니가 남 걱정 할 때야?”


기어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쏟는다. 제발 민우는 모르게 해야 한다고 울음에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려 보는 사람마저 가슴이 아프다. 


“에릭아,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제발 진정하고 천천히 생각하자.”

“Q엔터에서 뭐 해 달래?”

“제발 울지 말고 진정해.”

“뭐 해주면 되냐고!!”





Epilogue 3. mayday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우리 호텔 가서 놀던 날이지?”


에릭은 아예 소파에 몸을 길게 뻗어 누워 버렸다. Q엔터 사장의 딸인 장하연과의 스캔들을 터트리고 드라마니 인터뷰니 여기저기 시달리는 바람에 몸이 녹초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힘들 때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민우한테 연락 안한 거야?”


전진의 물음에도 죽은 사람처럼 대답이 없다. 혜성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한숨을 쉰다. 한밤중에 잔뜩 술에 취한채로 저를 찾아와 사진을 보이며 울며불며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참 대단도 해. 어떻게 방송국에서 이런 짓을 할 생각을 하니.”

“에릭, 민우한테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제야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아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두었다. 아무리 봐도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운 풍경이다. 지친 손길을 뻗어 잔에 담긴 술을 입으로 몽땅 털어 넣었다. 


“이거 제보한 기자는 찾아서 해외로 보내버렸어.”

“Q엔터 하라는 대로 다 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지금도 저렇게 난린데.”


전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지켜보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민우가 누군가에게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다는 걸 아는 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민우가 알게 해서는 안 돼.”

“어차피 알게 될...”

“안 돼.”


에릭의 표정은 단호하다. 우연이라도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각조차 해서도 안 된다.


“민우가 이걸 알았다가는... 제 손으로 제 목을 조를지도 몰라.”

“너 혼자 감당하기는 너무 큰일이야.”

“민우가 자존심이 얼마나 하늘같은지... 너희는 이해 못할 거야.”


아직도 사진을 보면 손이 떨린다.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혀온다. 너무 소중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지킬 수만 있다면 제 심장을 빼내어 바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진아, 나 좀 도와줘.”

“응?”

“혜성이도 노출되어 있어서 우리 둘 다 움직이면 안 될 거 같아.”


툭... 민우와 에릭의 행복해 보이는 사진 위로 서러운 물방울이 떨어진다. 세상 사람들이 다 뭐라고 저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을 갈라놓는지... 코끝이 빨개지고 하나둘 떨어지던 눈물은 후두둑 소리를 내며 사진 위로 떨어져 번졌다. 


“민우가... 지금 너무 힘들어 해.”

“알고는 있어?”

“저번에... 혜성이랑 나랑 갔던 압구정 곱창집 기억해?”

“거기 골목?”

“응... 요즘 민우가 자꾸 거기 가서 담배를 펴. 보고 있기가 힘들어.”

“빨리 이 상황을 끝내.”

“끝낼 거야... 끝낼 건데, 민우가... 아니 내가 먼저 무너질 거 같아.”

“......”

“가서 나한테 전화해줘. 민우 목소리 들어야 될 거 같아...”


전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과 민우 두 사람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망설일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