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민 : wishlist

제목없음

신화보리 2016. 7. 1. 00:36

햇살이 지나치게 눈부신 탓이다.   


일찍 찾아온 여름에 짜증이 났고 어디 까페라도 들어가 머리를 식힌다면 아마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5분쯤 목적지 없이 걷는데, 조용히 정혁의 뒤를 따라 걷던 민우가 불쑥 한마디를 꺼낸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

"나 벽이랑 얘기하나?"

"할 말 있으면 해."

"그럴까?"

"해."

"나... 그 사람 다시 만날 것 같아. 아니, 만나. 결혼식장에 안나타난 그 사람."  


정혁은 지난 밤 제가 집 앞에서 본 두 사람의 실루엣을 떠올렸다. 그 여자는 민우 앞에서 울었고 껴안았지만 민우는 안긴채였다. 아마 미안하다고 했을테고 뿌리치지 못한 거겠지. 그리고 밤새 그 장면이 눈 앞에서 사라지질 않아 밤을 꼬박 새웠다.  


"너..."

"사정이 있었대. 아직 나 사랑한대. 그래서 다시 만나보려고."

"참 쉽다."

"뭐?"

"다른 새끼 좋다고 널 차버린 년 다시 만나고 싶냐?"

"년... 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눈을 내리깔자 뒤따라오던 민우가 기가 막히단 표정이다. 더위 때문에 목 뒤로 흐르던 땀이 등 뒤로 흘러 등골이 서늘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얼굴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다.  


"그래, 나 쉬워. 엄청 쉬워."

"......"

"조금만 잘해줘도!! 그냥 마음 줘버려. 알잖아."

"그렇다고 널 버린 사람을 다시 만나? 벨도 없냐, 넌?"  


금방이라도 갈라질듯 톤이 올라간 민우의 목소리가 칼처럼 귀에 박혀 버럭 큰 소리로 대답하자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마음에 없는 말들로 가슴에 비수 꽂고는 어김없이 또 후회하고 만다.  


"나는!! 지금!!"  


목이 찢어질듯 심장을 내리치는 목소리.  


"아무라도 필요해."  


언제부터였을까. 니 목소리가 내 심장을 내리치기 시작한 날이.  


"날 버리고 간 여자라도 필요해. 사람 헷갈리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 너 때문에!! 심장 터져 죽지 않으려면!!"  


햇살이 지나치게 눈부신 탓이다.   


초여름의 무더위 때문에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보석처럼 빛나보여 설렜었다. 내려다 보는 눈길도 다정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헤아릴 수조차 없는 상처로 갈기갈기 찢어진 심장을 알아주고, 상처 받을 때마다 그곳이 어디든 나타나 달래주었다. 밤마다 상처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외로워하면 옆에 있어주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철벽같은 대나무숲이 되어 주었다.   


그런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수가 있겠니.   


마주친 눈빛이 한참동안 흔들렸다. 정혁은 민우의 외침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 무서운 이야기였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믿어줄게."

"......"

"날... 나를 좋아하는게 아니라면!!! 말해!!! 깨끗하게 포기하고 돌아가 버릴테니까!!!"  


민우의 발악에 정혁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다시 목적지 없는 길로 걸음을 돌렸다. 부서질 것 같은 건 너뿐만이 아니야. 몸부림치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그 뒷모습에 민우는 허- 하며 숨을 내쉬었다.  


"니가 세상에서 제일 나빠. 니가 제일 비겁해."  


먼저 걷는 정혁의 뒤를 뛰어가듯 따라가 팔을 붙들었다. 무슨 말이든 하란 말이야. 다시는 상종도 하기 싫단 얼굴만 하지 말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라는데도 왜 말 못해."

"미쳤어?"  


신경질적으로 민우의 팔을 내팽개치고는 다시 갈 길을 가는 모습에 악에 받쳐 다시 두 손을 뻗어 팔을 붙들었다.  


"말해."

"놔."

"왜 나한테 잘해줬니."

"놓으라구."

"내가 너 남자인데도 좋아하는 거 알았으면, 그럼 거기까지만 했어야지."  


애써 팔을 붙들던 두 손은 기어이 정혁의 멱살을 붙잡고 밀어부치기 시작했다. 그 무게에 밀려 쿵- 담벼락에 부딪혔다. 서늘했던 등골이 뜨겁게 타오르는 건 햇빛에 달궈진 탓인지, 아니면 사랑에 몸부림치는 민우 탓인지 알 수 없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듯 민우의 눈엔 서러움이 가득했다. 네 눈에는 두려움이 없구나. 난 이 길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불쌍해서 그랬다."

"......"

"그깟 여자 하나 털어내지 못하고 매일 울고 매일 술 마시고 매일 고통스러워 하는게 불쌍해서 그랬어. 어쩌다 옆에 있게 됐는데 모른 척 하냐, 그럼?" 

"그럼 됐어."  

"......"

"니가 내 옆에만 있어준다면 계속 고통 속에 있을거야."

"......"

"나는... 나는 니가 필요해."  


집착, 구걸... 사랑이라 표현하기에 절대 아름답지 않은. 어떻게든 널 붙잡을 수만 있다면. 길 한복판에서 이렇게 미친 놈처럼 발악해도 괜찮아.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 해도 상관없어. 너만이 날 불쌍하게 여겨 옆에서 위로해 준다면.  


정혁은 자신을 노려보는 민우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어떤 모진 말로 상처를 줘도 그대로 받는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다가와 문을 두드린다. 그런 널 어떻게 하면 좋니. 정혁은 두 손을 들어 멱살을 잡고 있던 민우의 손목을 잡아 떼어내고 대신 뜨거운 얼굴을 감싸쥐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감촉보다 더 뜨겁게 나를 필요하다고 하는 널. 그리고 잡아먹을 듯이 민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어떤 것도 생각할 틈도 없이 숨이 막히도록 퍼부었다. 허공에 버려지듯 떠돌던 민우의 두 팔이 정혁의 뒷목으로 둘러지고 두 사람은 마치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어떠한 공간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서로를 붙들고 오랜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숨이 막혀 죽어도 좋아. 이 시간이 영원할 수만 있다면. 사람 하나 지나지 않는 조용한 골목길 위로 두 사람의 입 맞추는 소리, 거친 숨소리만이 시간의 흐름을 말해줄 뿐이었다. 


하아... 


떨어진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오갔다. 정혁은 부서질듯 온몸으로 민우를 안았다. 정혁의 목 뒤로 둘러진 손이 아이를 어르듯 다정하게 정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목덜미에 깊숙히 묻은 정혁의 숨결 때문에 뜨겁다. 겨우 끄집어낸 모습이기에 꽉 붙들린 몸이 조여 아파와도 놓으라고 할 수 없었다. 그 고통도 이 순간에는 달콤하게 느껴지므로.  


햇살이 지나치게 눈부신 탓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토록 눈이 멀어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건. 

안된다고 백번 천번 외쳐도 필요하다는 단 한마디에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 사랑이라는 건 너무 지독하다.             






난 지금 아무라도 필요해.

날 버리고 간 사람이라도 필요해.

사람 헷갈리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 너때문에

심장 터져 죽지 않으려면

나쁜 놈 니가 세상에서 제일 나빠. 니가 제일 비겁해.


요 대사를 풀어쓰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굴렸던가 ㅠㅠ 

작가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