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아무도 모르게
대명절 구정을 홀로 보내고 나면 콧잔등에는 살살 봄내음이 나기 시작한다. 약간의 풀냄새와 따뜻해진 공기로 조금 있으면 봄이 오겠구나 싶어 조금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길었던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를 준비하고 알 수 없는 감정들에 두통을 앓았던 그 날이 잊혀질 때 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또 다른 사건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 학기와 함께 휴학이라는 길을 결정했다. 학교생활 말고 한국에 온 김에 다른 사회생활도 해보고 싶다는 이유를 선호에게 말했더니 그럼 영어학원 강사도 한 번 알아보라며 내게 종로에 있는 영어학원 몇 개를 추천해 주었다. 기껏해야 편의점이나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됐다 싶어 선호가 알려준 대로 몇 개의 학원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까지 보았다. 긍정적인 반응도 있었고 학생들은 실제 노랑머리의 외국인인 강사를 선호한다며 거절한 곳도 있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은 때라 싸늘한 날씨임에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더니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 어디에선가는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안고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무슨 일이야?”
10통이나 걸려온 민우의 전화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한참 동안 신호가 가도 받지 않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한참 만에야 너머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
“뭐? 안 들려. 크게 말해.”
[살려...줘...]
“어? 너 어디야!”
울음이 섞인 건지 죽어가는 것처럼 들리는 민우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종로 한복판에서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며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집... 이라며 녀석이 또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소리에 떠올린 건 지난 겨울부터 민우가 가기 싫어한다는 전진과의 동거 집이었다.
“집? 너 지금 살고 있는 집?”
[......]
“야, 나 거기 몰라. 어디야, 말해줘야 가지.”
다급한 마음에 물어봤지만 너머에서의 목소리는 끊어지고 신호음만이 귓가를 때렸다. 멍하니 초기화면으로 넘어가는 휴대폰을 바라보는데 금세 문자가 와 확인을 누르니 낯선 주소가 덩그러니 녀석이 있을 장소를 알려주었다. 다시 죽어가던 목소리의 민우를 떠올리자 슬슬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택시!”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갑자기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이 떠오르질 않아 기사아저씨에게 문자를 보여주며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잠시 당황하는 듯 하더니 알았다며 속도를 내는 것을 확인하고 초조하게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내리자마자 주소를 따라 낯선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다 바로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아르바이트생에게 길을 물었다. 그렇게 물어물어 걷다 보니 담벼락 저 쪽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어 동그랗게 말린 낯익은 느낌의 등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힘이 풀리려던 다리를 겨우 추스르고 녀석에게 가 팔을 잡아당기니 놀라 고개를 번쩍 든다. 커다랗게 뜨여진 눈을 보니 정말 올 줄 몰랐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집 어디야.”
“아니, 잠깐만...”
“어디 아파서 연락한 거 아니었어?”
“그게...”
“멀쩡하잖아!”
“아니... 아파...”
얼핏 봐도 어디 하나 다친 곳은 없었다. 단지 걸리는 건 부스스한 머리와 딱 봐도 얇아 보이는 트레이닝 바지에 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어 감기 걸릴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멀쩡하면서... 괜히 화가 나 흥분한 탓에 녀석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아프다며 뺀다. 녀석의 눈동자를 보니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왜. 아픈 게 아니면 무슨 일인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한테 전화를 해.”
“......”
“선호 불러?”
휴대폰을 꺼내자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왜 선호는 없고 내가 전화를 받고 와 여기 서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혹시 어디 다친 게 아닐까 걱정하며 달려왔는데 멀쩡한 걸 보니 허무함이 밀려 와 따질 기운도 없어 한숨을 쉬자 다시 기가 꺾여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는다.
“진이가...”
“......”
“진이가 짐 싸...”
기어갈 듯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기가 막혔다. 니가 이러는 것도 결국 그 자식 때문이구나. 주먹을 날렸던 그 날이 떠올라 어금니를 꽉 물고 다시 민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레 잡아당긴 탓에 녀석이 맥없이 바닥에 털썩 엎어지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질질 끌고라도 갈 기세로 잡아당기자 힘을 주어 버틴다. 하지만 녀석보단 내가 힘이 더 셌다. 질질 끌려오자 안 되겠는지 놓으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만 놓지 않았다.
“걔가 너한테 뭐라고 이러는 거야!”
“놓으라고!”
“걔 없다고 세상 무너지는 거 아냐!”
“나는 아니야!”
“......”
“나는 아니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이민우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전진이라는 놈을 향한 질투였을까. 아니면 살면서 누군가를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할 정도로 사랑한 적이 없어서일까. 전진이 없으면 이민우는 세상이 무너질 거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럴 것만 같았다.
나는 내게 선호가 없다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다.
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선호와 내가 밤새 사랑을 나누고 절정에 치닫는 그 때에도. 한동안 아무 생각 없던 머리는 다시 복잡해졌다. 놓아버린 녀석의 손이 힘없이 시멘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오던 길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보이고 걸음을 내디디려 하는데 그 걸음이 또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 한들 지금 본 녀석의 눈을 지울 수 있을까.
“나 왜 불렀냐고.”
“몰라...”
“......”
“몰라... 그냥 너한테... 전화해야 될 거 같았어...”
살며시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동그란 머리통을 보이며 바닥에 거의 엎어져 있다시피 한다. 봄이라고 해도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다. 일단 코트를 벗으며 녀석을 툭툭 발로 건드렸다.
“일어나- 쪼끄만 게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이 다 쳐다봐.”
그제야 부스스 일어나며 제 옷에 묻은 것들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멋대로 털다 보니 손에 묻은 흙먼지가 옷에 묻어 털어 내나 마나였지만 일단 코트를 녀석의 어깨에 둘러매주니 아까보다는 한결 보기 나았다. 내가 추워 죽겠지만.
“뭐하냐, 안 어울리게.”
“길바닥에 그러고 있으니까 거지같잖아.”
“가져가.”
어깨에 걸쳐진 코트를 내게 다시 건네며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가라- 짧은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는 녀석의 등을 보자마자 마음보다 몸이 먼저 녀석을 붙잡았다. 붙들린 팔 때문에 내 쪽으로 휘청하던 민우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다시 내게 눈길을 준다.
“도대체 나 왜 부른 거야.”
“아, 몰라-“
“밥 사.”
“뭐?”
“밥 사줘. 나 여기 택시 타고 왔어.”
“에이씨, 남은 지금 애인한테 차여서 질질 짜고 있는데...”
장화 신은 고양이의 고양이처럼 최대한 불쌍해 보이도록 표정을 지었다. 나야 안보여서 모르지만 앞에 서있는 녀석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흠, 지갑 없어.”
“가자, 사줄게.”
“어? 야-“
배도 고팠지만 이 녀석을 여기 놔두고 갔다가는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 녀석 걱정을 하는 거지... 생각했지만 꼭 답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팔을 놓지 않고 버티자 할 수 없다는 듯이 내 쪽으로 걸음을 와 그렇게 같이 내가 온 길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계속 뒤를 돌아보는 민우를 느낄 수 있었지만 일부러 아는 척하지 않았다. 이 팔을 놓으면 당장에라도 그 자식에게 달려갈 모습이 상상이 됐다.
“비싼 거 좀 사라.”
“이 정도면 비싼 거지.”
뜨끈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어서 데려간 곳은 24시간 내내 한다는 설렁탕집이었다. 우유색 같은 국물을 빤히 보며 밥공기를 뚜껑을 덮은 채 두 손으로 들어 격하게 흔들자 마주 앉은 녀석은 헐- 하면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왜- 밥 먹는 거 처음 봐?”
밥공기 뚜껑을 열어 덩어리를 국물에 빠트리고 깍두기 국물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턱을 괴고 보는 녀석의 눈길에 잠시 동작을 멈추고 눈을 마주쳤다.
“너네 엄만 너 기특하겠다.”
“밥 이렇게 먹는게 기특한거냐.”
“기특하지. 미국에서 잘 키운 아들이 고향에서 공부하겠다고 서울에 혼자 와서 밥이나 잘 처먹고 다니나 걱정하실텐데.”
자장면을 먹을 걸 그랬나... 잠시 스쳐간 생각을 지웠다. 앞에 앉은 녀석이 숟가락으로 국물을 휘휘 저으며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건 다 어떤 한 녀석 때문이다. 그 놈은 분명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어야 할 이 녀석이 없는 걸 보고 더 화낼지도 모르겠다. 그냥 두고 왔어야 했을 텐데 그 곳에 간 이상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결국 반도 더 남은 녀석의 그릇을 확인하고 가게를 나섰다. 둘 다 목적 없이 걷는데 콧잔등에 닿은 찬바람 때문에 훌쩍이며 고개를 돌리자 귀까지 새빨개져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덜덜 떨고 있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코트를 벗어주면 거절할 것 같아 망설이는데 저 쪽에 아직 머플러를 팔고 있는 노점상이 보여 민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녀석은 커다랗게 눈을 뜨고 내게 물음을 던졌지만, 난 대답 없이 가장 앞에 놓인 새빨간 머플러를 들어 대충 녀석의 목에 둘렀다.
“뭐야?”
“아저씨, 이거 얼마에요?”
“만 오천 원.”
“뭐냐고-“
민우의 물음은 대답하지 않고 아저씨에게 만 원짜리와 오천 원 한 장씩을 쥐어드리고 다시 녀석의 팔을 붙들었다. 머플러 끝을 들어 빤히 쳐다보더니 내 얼굴과 그것을 몇 번 또 번갈아 가며 본다.
“야.”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야, 똑바로 매줘. 아니면 팔을 놓던가.”
아, 창피... 불타오르고 있을 내 귀를 떠올리며 그제야 팔을 놔주었다. 슬쩍 곁눈질을 하니 제대로 두르지 못해 낑낑대 고쳐 매주었다. 얇은 셔츠 한 장에 얼굴을 반쯤 가린 새빨간 겨울 머플러의 조화는 정말 개그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춥긴 추웠는지 풀지 않고 얌전하게 하고 있는 모습에 조금 뿌듯하기는 했다. 그리고 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둘 다 말이 없는 인간들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1초가 10초처럼 길게 흘러가고 있었다.
“손-”
먼저 침묵을 깬 건 녀석이었다. 느닷없는 한글자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코트에 넣은 손을 빼 녀석에게 내밀었다.
“아니 왼손.”
오른손을 툭 쳐버리고는 왼손을 달라며 작은 손을 내민다. 주문대로 왼손을 내미니 뒤집어 내 손바닥을 제 손 끝으로 어루만진다. 그리고 상처가 난 자국을 따라 손톱으로 슥 긁어 내린다.
“상처 안 없어지네.”
“좀 있어야 된대. 아프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머리통이 그날을 생각나게 했다. 일부러 접어서 꾹꾹 숨겨놨는데 절대 두 번 다시는 찾지 않으려고 구석에 밀어두었는데. 한 번 생각이 터지니 홍수처럼 한꺼번에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참을 살피던 녀석은 그렇게 내 상처를 따라 주무르듯 꾹꾹 누르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한 발 물러서 버리고 말았다. 맑고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너 손 되게 차다.”
쿵쿵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그 눈동자를 노려보는데 왜 자꾸 민우에 대해 궁금해 하냐던 동완이의 물음이 떠올랐다. 사실 궁금한 것은 없었다. 사실 궁금했던 건 내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의 모든 것.
“왜 이렇게 떠냐? 너 나 좋아하냐?”
장난 섞인 물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녀석도 피식- 덩달아 바람 빠진 소리를 낸다.
“니가 생각해도 웃기지?”
이어지는 물음에 손을 내려 주머니에 다시 감췄다. 어색하게 웃으며 녀석을 툭 치자 어어- 소리를 내며 몸을 기울여 밀리는 흉내를 낸다.
“간다-”
바뀐 신호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 섞여 걸음을 내딛던 녀석은 크게 손을 흔들며 이별인사를 했다. 그에 응해야 했기에 손을 들어 살며시 흔들었다. 내 시선이 저를 떠나지 않는 것을 알고 머플러를 가리키며 고마워- 또박또박 입모양으로 말한다.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아-”
사람들 사이로 파묻힌 녀석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전진에게 주먹을 날렸던 그 때로, 아니 민우가 아파서 혜성이의 까페에 있었을 때로, 아니 더 앞으로 가 선호의 생일, 아니...
아예 이민우라는 놈 자체를 내가 모르던 때로...
가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내 가슴이 찢어질 일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선호를 사랑할 때에는 온 세상이 아름답고 환하고 사랑스럽게만 보였는데 녀석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올수록 난 왜 더 비참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으이씨...”
지금 이 순간 내 얼굴을 누군가 본다면 분명 더럽다고 욕을 할 것이다. 흐르는 눈물, 콧물을 닦지 않은 채 서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찬바람을 맞으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왼손바닥이 칼로 그은 것처럼 아프다. 내 생명선을 두 동강내버린 건 유리조각이 아니라 이민우 그 녀석이었다.
“형, 몸무게 재봤어?”
“응?”
“학원 힘들어?”
“... 아니.”
“왜 그래. 봄 타나?”
사라진 건 전진만이 아니었다. 횡단보도에서의 헤어짐 이후 민우는 모습을 감췄고 혜성이네 까페에도 나오지 않아 아르바이트는 결국 선호가 하게 되었다. 나는 예정대로 강사로 뽑힌 학원에서 저녁타임으로 영어강사를 하기 시작했다. 추웠던 겨울날씨는 가고 노란색, 핑크색의 예쁜 꽃들과 따뜻한 바람이 삭막했던 도시를 물들였다. 봄은 설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선호야.”
“응?”
“아직도 형이랑 같이 살 생각 없어?”
“... 생각해 볼게.”
변명을 하자면, 마음에서 선호를 밀어낸 건 아니다. 내 마음이 온통 선호로 가득했었다면 어느 날 갑자기 툭 무언가 내 마음에 떨어져 점점 뿌리를 내리고 언제 컸는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커져간 것이다. 선호는 여전히 아름답고 예뻐서 늘 웃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녀석은... 서빙을 위해 곁을 떠난 선호의 등 뒤로 작게 한숨을 뱉었다.
“어? 민우야!”
생각이 또 많아지자 눈을 감고 있는데 한 톤은 올라간 선호의 목소리에 번쩍 눈이 뜨여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아, 이게 뭐야- 양아치 같잖아!”
“이상해?”
“아니야, 귀여워! 진작 이렇게 좀 하지-”
선호는 뭐가 그렇게 신난 건지 폴짝폴짝 뛰며 회색빛으로 물들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호를 위해 허리를 조금 구부정하게 숙인 녀석은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너 때문에 했던 고민들이 다 소용 없어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허탈함에 바람 빠지는 웃음만 나왔다. 선호야, 나 토마토주스~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선호를 뒤로하고 녀석이 저벅저벅 구석에 처박힌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앉자마자 털썩 테이블에 엎드린다.
“아- 죽겠다.”
우습게도 제일 먼저 확인한 건 녀석의 왼손이었다. 반지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녀석의 짧은 회색 머리를 툭 건드렸다. 귀찮은지 머리를 흔드는데 그게 또 귀여워 더 툭툭 건드렸다.
“어디 갔다 왔냐.”
“바다. 야, 너 한국 와서 바다는 한 번도 안 가봤지.”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눈동자를 위로 뜨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는 무슨 웃긴 일이 생각났는지 혼자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남이 보면 저게 미쳤나 싶을 정도로.
“야, 우리 형들이랑 다같이 5월에 동해에 한 번 가자. 그때는 싸고 날씨도 따뜻해서 놀기 딱 좋대. 혜성이형 차 있으니까 그거 타면 다 뭐... 들어가겠지.”
“재밌었어?”
“어. 내가 거기 민박집을 갔는데... 아무튼 거기서 자려고 갔는데 주인아저씨가 날 보더니 총각 몇 살이야? 그러는 거야. 그래서 20대 초반입니다. 하니까 힘 좀 쓰겠네? 공짜로 자게 해줄 테니까 일 안 할래?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졸지에 그 집이 횟집인데 거기 일꾼이 되어가지고 거기서 실컷 놀고먹고 자려고 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박스 나르고 가게 열면 서빙하고...”
“천천히 말해. 아무도 안 따라와.”
“야,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냐?”
숨도 쉬지 않고 말하는 녀석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드니 동완이가 어느새 옆에 와있었다. 민우가 왔다는 소식에 금방 달려온 것 같았다. 엉덩이로 나를 툭 밀어 안쪽으로 집어넣고는 동완이가 민우의 앞자리를 차지했다.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민우는 눈앞의 사람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해맑은 모습이라 어쩐지 억울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바다를 갔거든-”
내게 했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동완에게 신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동완이가 오버하며 대답을 해주자 민우는 더 신나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그 날 죽을 것처럼 아파하던 녀석이 이렇게 밝게 돌아오니 내 가슴은 썩고 있다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 동완이형.”
아, 나도 저 놈한테서 형 소리 듣고 싶다. 아니 이름이라도 좀... 난 이미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못한 채 방청객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품이 절로 나는 게 졸리기도 하고...
“집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왜?”
“진이 나가고 나니까 휑해서.”
“알았어. 혼자 살 정도면 돼?”
“응.”
사실 저렇게 만나고 헤어짐의 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는 녀석들이 부러웠다. 2년을 넘게 녀석들과 있지만 동갑인 동완이에게도, 혜성이에게도 지금의 흔들리는 내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녀석들은 나를 언제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취급을 했고 가끔씩 농담으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졸음이 쏟아져 손등으로 눈을 비비는데 멍한 눈동자가 민우의 커다란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넌 얼굴이 그게 뭐냐.”
“뭐가.”
“민우야, 형 밥 좀 먹으라고 해줘.”
빨간 토마토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민우에게 내밀며 선호가 울상이다. 언제부턴가 선호는 내가 자꾸 말라간다며 속상해 했다. 선호의 울상에 테이블에 놓인 내 왼손을 가져다 뒤집어 손바닥을 확인한다.
“얘 이거 갈라지고 나서부터 마르는 거 같아.”
“어? 뭐가?”
“이거 생명선.”
상처는 자국만 남았을 뿐 거의 다 나았다. 민우가 말했던 생명선을 가로지른 상처를 다들 확인하느라 내 손만 녀석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옆에 있던 동완이가 으이그- 하며 주먹으로 내 팔을 세게 쳤다.
“내가 뭘!”
“나중에 얘기하자~”
“어? 뭐야. 둘이 나 모르는 비밀 있는 사이야?”
“아가씨는 가서 커피나 타오시지?”
동완이가 씩 웃으며 엉덩이를 툭- 치자 선호가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더니 동완이의 발목 쪽을 세게 걷어찼다. 악- 동완이의 짧은 비명에 만족한 듯 눈이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짓고는 뒤돌아서 가버린다. 아파하면서도 어쩐지 큭큭- 대는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형, 진이는 만나봤어?”
“왜-”
“아니, 그냥...”
“만났어도 안 알려줘. 미련 갖지 말고 얼른 정리해.”
“응...”
아까까지 밝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길 잃은 강아지처럼 축 쳐져서는 눈을 내리깔고 토마토주스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어 잘근잘근 씹는다. 그 모습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동완이가 내 팔을 툭 쳐 시선을 주니 바깥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얼떨결에 일어나 나가는데 나를 테이블 밖으로 밀어내고는 다시 앉아버린다. 순간 이 녀석이 왜 그랬는지 눈치를 채고 나서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걸음을 돌려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선호는 저쪽 구석에 서빙 중이었고 카운터 앞에는 혜성이 앉아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뭐해?”
“그냥 올해는 어디를 여행 가볼까 보는 중.”
“민우가 같이 동해 가자는데.”
“음, 그럴까? 그 쪽으로는 한 번도 안 가봤지?”
“응.”
“그래. 그럼 정동진 쪽을 좀 볼까.”
따다닥- 키보드 소리가 거슬렸다. 그렇게 멍하니 서있는데 어느새 온 선호가 나를 툭 치고 다시 서빙을 위해 발걸음을 돌려 멀어졌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 선호는 계속 바쁜 채였다.
“신혜성.”
“응.”
“민우랑 그 남자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내 물음에 녀석의 손이 멈췄다. 눈길은 바로 선호가 돌아간 길을 살폈고 그 다음에 내 얼굴을 쳐다본다. 그런 혜성이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자 먼저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진이 그런 애 아니야.”
“어?”
“그날 너한테 시비 걸었던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분명 그 남자와 나는 서로 소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이였는데. 그 남자가 나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내가 거슬리는 짓을 한 적도 없었고 그저 지독한 호모포비아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또 혼란스러워 졌다.
“민우가 널 좋아하는 거 같아.”
“뭐?”
“진이가 민우가 핸드폰을 가끔 쓰는데.”
“그런데?”
“처음에는 앨범에 너랑 선호 사진이 많았대. 민우야 워낙 사진 찍는 거 좋아하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그런 건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대놓고 휴대폰으로 선호와 나를 찍어대는 통에 신경이 쓰였지만 나중에는 찍는 소리가 나도 의식도 하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너만 있더라는 거야.”
“뭐?”
“너만, 니 사진만 있더래. 민우 핸드폰에.”
“말도 안돼.”
“널 한 번 보고 싶다고 한 것도 진이였어. 보고 나서 더 열 받은 거지. 민우는 진이를 중심으로 살던 앤데 니가 진이 자기 자신보다 더 잘났다는 걸 깨닫는 순간 욱해서 너한테 그날 그런 거야. 게다가 넌 천상 게이잖아.”
“신혜성 그만. 걔가 그래서 그 날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거라고? 나 때문에 민우랑 헤어지는 거고?”
“그래. 남자는 사랑보다 자존심이야. 내 여자가 다른 남자한테 눈길 주는 것도 열 받는데 그 남자가 나보다 훨씬 잘난데다 내가 이해 못하는 것까지 이해해주는 놈이면 얼마나 열받냐. 너도 남자니까 알잖아.”
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통수가 얼얼했다. 혜성인 서빙을 마치고 카운터로 돌아온 선호에게 수고했다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다. 충격과 공포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도저히 동완이와 민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가 힘들었다. 선호가 내게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건넸지만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외계어로 들리기까지 했다.
“형 얼굴이 왜 그래.”
내 표정은 지금 어떨까.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난 민우를 좋아한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가슴에 담아두기 시작했다. 민우는 지 애인 놔두고 날 좋아하는 거 같아 애인이 자존심 때문에 못 참고 떠나버렸다. 둘 중에 하나는 듣지 말았어야 했다. 무언가 더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누구에게인지 모를 물음을 던졌다. 선호는 뜬금없는 내 물음에 응? 하며 다시 물었다. 그 맑은 눈을 보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짧은 혜성이의 대답에 선호의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긴다. 동완이형도 혜성이형도 오늘 우리 형한테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냐며 따지지만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아니, 선호는 알면 안 된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약이 잔뜩 오른 선호가 좀 흥분한 것 같아 손으로 두 귀를 막아주었다.
“선호야.”
“......”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형 괜찮은 거지?”
“응.”
“형들이 뭐라고 하면 나한테 일러. 알았지?”
“... 오늘은 민우 오랜만에 왔으니까 같이 놀아. 나 먼저 갈게.”
“왜-”
선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나가는 문으로 향했다. 지금 민우를 본다면 내 머릿속은 온통 저 녀석이 날 좋아할까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꽉 차버릴 것 같아 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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