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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민 : 위험한남자 (완)

위험한 남자 5 (완)

Chapter 5. 거짓말




“왜.”


발갛게 웃는 표정이던 선호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다시 도어락을 열려 하는 손을 잡자 내 손을 세게 내리치고는 결국 문을 열었다. 내 손목을 꽉 붙들고는 안으로 들어선다.


“왜.”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는 신발도 벗지 않고 굳은 채 서있었다. 선호의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게 보였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데 선호가 먼저 울음을 터트린다.


“왜 말 안 해. 왜 그만해야 되는지 말을 해야 될 거 아냐.”

“그만해.”

“그러니까 왜냐고!”


발목이 부서질 것처럼 바닥에 발을 구르며 목에 핏대가 서고 피를 토하도록 소리를 지른다. 선호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나를 붙잡고 매달려 흔들기 시작한다.


“아니잖아, 형. 아니잖아!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왜!!!”

“선호야-”

“내가 형 집에 가서 살게. 커밍아웃이라도 할까? 형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럼 왜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이선호!!!”

“형... 갑자기 왜 이러냐고... 왜...”


매달리던 선호는 끝내 무릎을 꿇고 내 다리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왜 이러냐며 소리를 지르고 제발 이러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날의 기억이 선명해져 내 눈을 가렸다.


“선호야... 난...”

“형, 제발...”

“나는...”

“......”

“지금 너보다... 혼자 울고 있을 그 애가 더 걱정돼.”

“뭐...?”


눈물로 엉망인 선호가 벌떡 일어나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흔들리는 눈빛에 마음이 아파온다. 더 이상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 애가 누구야?”

“나 때문에 울고 있어.”

“......”

“나 때문에 그 애가 힘들어해.”

“......”

“나 때문이라서 내가 위로해 주고 싶어. 그게 이유야.”

“... 거짓말.”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너무나 정확한 이유라 과장할 것도 꾸밀 것도 없었다. 손을 뻗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쿵쿵 뛰는 심장에 숨을 가다듬지만 쉽지 않다. 따라 나와 잡으려는 선호의 손을 뿌리쳤다. 아아아악-!!! 비명이 들려왔지만 귀를 막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선호와 나. 우린 이제 끝이다. 나는 이토록 잔인한 인간이었던가.




“어? 선호 아까 나갔... 야!!!”


까페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에 있던 혜성이가 벌떡 일어나 나를 붙잡았다. 그 손을 뿌리치며 가게 안을 둘러보는데 저 멀리 서빙을 하고 있는 민우가 보였다.


“무슨 일이야, 에릭아.”

“민우 좀 잠깐만-”

“... 야, 야!”


안쪽으로 빠르게 들어가 민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본능적인 건지 내 손을 쳐내는데 화가 나 다시 손목을 꽉 붙잡았다. 몇 번 힘을 주더니 놓아주지 않자 포기해 버린다. 가게 안이 우리 때문에 웅성거리기 시작해 그대로 잡아당겨 들어온 문으로 다시 향했다.


“야! 너 선호는-”


혜성이의 말을 들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버티는 녀석을 억지로 끌어당겨 가게를 나서며 주위를 살펴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을 것 같은 골목 안 쪽으로 들어섰다. 멈춰 서자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는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깐 뛰어왔을 뿐인데 우리 둘 다 오래 달리기를 한 사람들처럼 숨을 가쁘게 몰아 쉬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알아, 나.”

“뭘.”


그 날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 낯설었다. 연인의 빈자리에 눈물을 보이며 내 손이 닿을 때마다 가슴 무너지는 소리를 내던 그 녀석과 지금 내 앞에서 미간을 찡그린 채 화를 내고 있는 녀석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나만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생각해 보니 녀석은 그 날의 전 날처럼 멀쩡하게 학교를 다니고 까페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난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선호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어 상처를 주고 마음은 저 놈으로 가득 차 지옥이고 엉망이다. 왜 나만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민우 너, 나 좋아하잖아. 아니야?”


쉽게 대답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는 눈을 하고 대답을 망설인다는 것만으로도 녀석이 나를 좋아하는 게 맞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확신이 들었다.


“난 죽을 것 같아.”

“아니야.”

“아니야? 난 지금 너 때문에 속이 터져 죽을 것 같다고.”

“야- 미쳤어?”

“내가 미치겠다고!”


소리를 지르자 한걸음 물러선다. 도망가 버릴 것 같아 팔을 붙잡았다. 뜨거운 머리 때문에 눈동자가 튀어 나올 것 같아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볼을 타고 식어갔다. 앞에 선 녀석에게서 아주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왜 널 좋아하냐고. 넌 선호 애인이잖아.”

“니 핸드폰에 내 사진은 그럼 뭐야.”

“......”

“그 날 왜 날 거절하지 않은 거야.”

“......”

“난 미치겠는데, 아무것도 못하겠는데... 왜 넌 그대로인 거야...”


대답을 원하는 물음이 아니었다. 무작정 이 녀석 마음도 나와 같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느님처럼 굳게 믿어서 대답을 듣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았다.


“내가 지금 선호한테 무슨 짓을 하고 온 건지 아냐고...”

“선호 왜...”


선호라는 말에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는 손길을 잡아 뺏어 액정을 켰다. 보이는 건 진이라는 녀석의 얼굴이라 급한 손놀림으로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앨범을 확인하니 혜성이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내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없어, 너. 그 날 다 지웠어.”

“왜.”

“선호한테 뭐라고 한 거야. 설마 우리 둘이 잔 거 얘기한 거야?”


하아... 왼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이 막히는데 숨쉬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좋아지리라 기대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저질러도 마음은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선호한테 뭐라고 한 거냐고.”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는 들은 거야?”

“됐어. 하지마.”

“너 때문에 선호한테 헤어지자고 말하고 왔다고. 너 때문에 미칠 것 같다고.”

“......”

“너랑 섹스하고 나서는 너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단 말이야. 내가 엉망이라고...”


나를 보던 눈빛이 툭 떨어져 바닥으로 향했다. 내 손에 들린 제 핸드폰은 포기한 것 같았고 엉망이기는 녀석도 마찬가지일 텐데 내가 느낀 괴로움이 전해진 것 같아 미안해졌다.


“부러웠어.”


잠시 진정되었던 심장이 두근두근 점점 빨라졌다. 저 멀리서 들리는 차소리, 사람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녀석의 작은 웅얼거림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는 소리처럼 설레었다.


“진이는 원래 게이가 아니라서 처음엔 선호가 부러웠어. 너네는 둘 다 게이니까 내 마음을 몰라주는 진이랑은 다를 거 같았어. 그러다가 동경했어. 니가 다른 사람들 눈길 하나도 신경 안 쓰고 선호만 챙길 때마다 나한테도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 진이가 짐을 싸고 나가버려 괴로운데 니가 생각났어.”

“날 불렀잖아.”

“그래. 넌 누구에게나 다정하니까...”

“......”

“내가 널 좋아한다고?”

“......”

“아니, 내가 좋아하는 건 너란 애가 가진 다정함 뿐이야.”


누구에게나 보여주던 모습이었는데 오히려 내가 첨벙 빠져 들었다. 이렇다 저렇다 앞 뒤 재보지도 못하고 한구석을 차지하던 녀석은 순식간에 내 몸과 마음을 온통 자신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왼손을 들어 바닥을 향한 녀석의 시선에 닿을 수 있게 펼쳐 보였다. 이젠 희미해져 보일 듯 말 듯한 상처를 손가락 끝으로 그리는 녀석의 손을 잡았다.


“처음부터 넌 선호애인인데 내가 널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런 걸 말하라는 게 아니야.”

“그날은 너무 힘들어서 기댈 데가 필요했어.”

“그럼 나랑 왜...”

“... 그래. 니가 아니었어도 날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만 있었다면...”


더 이상의 대답이 듣기 싫어 억지로 잡아당겨 입을 맞추자 밀어버린다. 밀린 만큼 다가가자 그만큼 뒷걸음질 친다. 나는 이렇게 너를 원하는데 너도 날 원하는 걸 아는데 왜 달아나는 거야.


“이럴 거면 차라리 미국으로 가. 너 이러는 거 보기 싫다.”

“거짓말.”

“선호 힘들게 하면 난 너 친구로도 볼 수가 없어.”


나를 뿌리치는 손과 나를 노려보는 매서운 눈길과 오던 길로 돌아가려는 발걸음이 미웠다.


“사랑해.”


내 고백에 잠시 멈췄던 걸음이 다시 움직여 나에게서 더 멀어졌다. 끝까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던 녀석은 끝까지 선호라는 방패로 나를 밀어냈다. 우리 둘만 서로 사랑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그 어떤 마음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같이 바다에 놀러 가자 약속했던 계절을 지나 무더위가 찾아왔고 다시 학원강사 일을 시작했고 남는 시간도 틈틈이 영어과외를 하며 학비를 버는 데만 집중하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던 시간들이 다시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에릭쌤! 내일 종강이죠!”


퇴근을 위해 가방을 챙기는데 교복을 입은 학생이 불쑥 얼굴을 내밀어 한 발 물러섰다. 아이는 뭐가 신나는지 큭큭 대더니 정체 모를 커다란 상자를 내게 내민다. 종강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처럼 멀뚱히 서있으니 다시 상자를 내밀어 얼떨결에 받아 품에 안았다.


“아, 고마워. 오늘이 며칠이지?”

“우리 엄마가 어른 되면 날짜 가는 것도 모르고 산다더니 선생님도 벌써부터 그러세요? 28일이잖아요! 선물은 집에 가서 풀어 보세요. 휴가 끝나고 다시 만나요~!”


제 할 말만 하고 훌쩍 가버리는 아이의 뒤통수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고는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니 위쪽 한가운데에 크게 박힌 7이라는 숫자가 눈에 뜨였다. 덥다고는 느꼈는데 벌써 7월이다. 녀석을 보지 못하면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았던 나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한 손에 선물을 들어서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내일 뭘 할까 고민해 보지만 어차피 하루 종일 영어과외였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혼자 맞이하는 휴가라 쓸쓸할 것 같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혼자서라도 바다를 가볼까. 지금 가면 또 다른 느낌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집에 도착해 문을 열려 하는데 갑자기 손등 위로 그림자가 졌다.


“깜짝이야!”

“놀랬냐?”


혹시 나 꿈을 꾸는 것일까. 너무 그립고 너무 외로워서 신기루를 보는 건 아닐까. 놀랐던 그 자세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은 채 눈만 깜박이자 녀석이 내 눈 앞으로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녀석과 눈을 마주치는데... 아...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자 녀석이 헛웃음을 친다.


“야, 너 너무 감동한다. 아직도 나 좋아해?”


그 장난끼 많은 눈웃음도 그대로. 애교 섞인 목소리도 그대로. 나를 아프게 했던 그 녀석 그대로인 이민우다. 


“어? 나 아직도 좋아하냐고.”

“... 내가 미쳤냐?”

“헤- 거봐.”

“왜 왔어.”

“가보면 알지롱~”


애매한 대답을 한 채 내 팔을 잡아당겨 쉽게 끌려갔다. 그 와중에도 난 지금 눈 앞에 있는 녀석이 현실이라는 착각에 빠진 게 아닐까 걱정스러움에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누군가 내게 주는 선물이라면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다.


“가위바위보 해서 내가 졌어. 넌 애가 왜 그러냐. 핸드폰은 왜 꺼놓고.”

“다들 잘 있지?”


까페로 가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창밖에 시선만 둔 채 아무 말이 없자 녀석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귀찮음에 말을 끊고 물음을 던지는데 녀석도 내 말에는 대답도 않고 내 왼손을 가져다 손바닥을 살핀다.


“되게 오래 간다, 이거.”


내 손을 조물거리는 녀석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헛기침을 하더니 내 손을 놓고는 내 품에 들려있는 짐으로 눈길을 돌린다.


“뭐야? 내 선물이야?”

“선물?”

“아, 뭐야. 오늘 내 생일인데 좋다 말았네.”

“아- 그래, 이거나 가져라.”

“이히-“


궁금해하는 녀석에 주저 없이 상자를 건네주자 얼른 포장을 뜯는 모습이 어린 아이 같았다. 녀석이 연 상자에는 온갖 과자와 사탕 등 군것질 거리들로 가득했다. 민우는 그 과자들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던 쪽지를 찾아내 펼치더니 그 안에 글씨들을 휙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에릭샘 어쩜 저보다 마를 수가 있어요. 미워요! 당 섭취 많이 하고 살 좀 찌세요. 그리고 학원 저번처럼 중간에 휴가 가지 말고... 휴가 갔었어?”

“계속 읽어.”

“저희 졸업할 때까지 샘 해주세요. 오오~ 에릭샘 인기 많은가 봐?”


넌 누구에게나 친절하니까... 문득 녀석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창가에 기댔던 몸을 반대로 기울여 녀석에게 기댔다. 힘을 주자 버티는 힘이 느껴져 괜히 웃음이 났다. 민우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것만으로도 난 여전히 가슴이 뛰었다.


어느새 도착해 까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잠깐 느꼈던 행복이 역시 꿈이었나 보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선호가 지금이 현실임을 일깨워줬다.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있는데 민우도 놀라는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고 내게 눈을 맞추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선호가 우리를 먼저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피할 새도 없이 구두 끝으로 내 정강이를 걷어찬다. 방심하고 있던 차라 아픔에 허리를 숙이니 이번엔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등을 철썩철썩 내리쳤다.


“인간아!! 니가 인간이야!! 그렇게 홀랑 연락을 끊어버리면!!”

“선호야! 애 죽어. 그만해! 임마- 그냥 맞지 말고 좀 도망치든가 움직여!”


그래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선호가 멈추지 않자 민우는 결국 선호 양손을 잡고 내게서 떨어트려 놓느라 옆구리에 꼭 끼고 있던 과자상자를 놓치고 말았다. 투명한 봉지 속 과자는 부서지고 동그란 사탕은 데굴데굴 굴렀다.


“나랑은 연락 못해도 형들도 있고 민우도 있고!!”

“미안해...”

“인간이 왜 이렇게 못됐냐! 원래 없던 사람처럼 굴면 내가 뭐가 되냐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씩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선호는 말 끝을 흐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참을 때의 버릇이다. 내 마음만 생각하느라 몰랐다. 눈 앞에 없다고 잊혀지는 게 아니었는데 안보는 게 안 보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더 그리웠는데 애써 외면했다. 괴롭고 싶지 않아 피했는데 그날에서 더 나아진 게 없었다.


“그래서... 그 새끼랑은 됐냐?”

“아니.”

“쌤통이다, 병신.”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에 선호도 큭큭 웃었다. 민우의 표정을 보고 싶은데 볼 용기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 허리를 숙여 떨어진 과자들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하자 선호도 쪼그려 앉아 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디서 받았냐 누구에게 받았냐 조잘조잘 원래의 선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야, 이민우 너도 주워. 니가 떨어트렸잖아.”

“너 때문이잖아. 니가 다 주워 갖고 들어와.”

“야-!”


대충 두어 개를 주워 상자에 휙 던지더니 먼저 까페로 올라가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아, 그날... 있잖아.”

“......”

“쟤랑 나랑 엄청 울었다?”

“응?”

“끝날 시간 돼서 왔는데 민우가 탈의실에서 엄청 울고 있는 거야.”

“왜?”

“몰라. 그래서 민우 달래다가 나도 또 울고 혜성이형은 신경질 내고...”

“왜 울었는지는 얘기 안 해?”

“응. 비밀이래... 다 주웠다. 들어가자.”


상자뚜껑까지 덮고는 먼지를 쳐내는 선호의 손놀림이 느리게 보였다. 선호의 말에는 해답이 없었다. 그날 그 녀석은 아무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탈의실에 들어가 혼자 엉엉 울었다. 무엇 때문에 운 건지 아마 자신도 모를 것이다. 왜 그렇게 혼자 서럽게 울었던 걸까. 그 날을 기억하고는 있을까. 가슴이 답답하다.


“야, 이자식아!!”

“스탑! 스탑!!”

“안그래도 선호가 엄청 팼어.”

“잘못했어요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혜성이가 아까 선호처럼 손을 번쩍 들고는 내게로 다가왔다. 놀라서 도망가려 하자 민우가 구세주처럼 한마디 거들어 바로 두 손을 모아 우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한대만 맞아라. 하며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마침 안에 있던 동완이가 케이크 상자를 들고 나와 인사를 건넸고 다같이 오랜만에 큰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진이 없으니까 아쉽네.”

“그러게.”


선호가 툭 꺼낸 말에 민우가 맞장구를 쳐 놀라는 눈으로 혜성이에게 물으니 ‘군대 갔어.’라며 작은 대답이 왔다. 그렇게 조촐하게 민우의 생일파티가 시작되었고 모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즐겁게 웃기만 했다.


“선호야, 일어나. 집에 가야지.”

“혀엉...”

“정신 차리자~”


기분이 좋아서인지 잔뜩 취한 선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등을 다독이며 깨우니 습관대로 내게 매달려 뿌리치지 못하고 어색하게 공중에서 놀던 손으로 선호의 등을 쓸어주었다.


“선호야. 그만 하고 일어나자. 집에 데려다 줄게.”


내가 움직이지 못하자 멀리서 보고 있던 동완이가 다가와 선호를 일으켰다. 내게 가도 된다며 손사래를 치는데 뭔가 기분이 묘했다. 학원에서 받은 종강 기념 선물을 다시 안고 주방에 있던 혜성이에게 인사를 하고 나니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탈의실까지 둘러보고는 가게를 나서자 홀로 나선 어두운 골목이 조금 무섭다 느껴졌다. 터벅터벅 걸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어 의자에 앉아 멍하니 버스를 기다렸다. 아, 휴대폰... 녀석에게 거절당했던 그날 이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던져버린 휴대폰이 어디 있을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디 갔냐 언제 갔냐 문자라도 하나 보내고 싶은데 한숨만 나왔다.


“지금이 몇 신데 버스를 기다려.”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손목시계도 휴대폰도 없으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고 버스 시간 안내 전광판 모니터에는 삐뚤게 손으로 쓴 ‘고장’이라는 글자만이 하얀 종이에 커다랗게 박혀 모니터에 붙어 있었다. 녀석의 목소리가 나를 깨우기 전까지 내 시간은 정지모드였다.


“너 나 안 왔으면 여기 계속 있었겠다?”

“아, 몇 시야?”

“한시.”


대충 대답을 하고는 의자 끄트머리에 앉은 나를 툭 쳤다. 슬금슬금 안쪽으로 엉덩이를 옮기자 내가 앉았던 자리에 제 엉덩이를 붙인다. 잠시 어색함이 흘렀다.


“잘... 지냈어?”


어두운 밤하늘 아래 피곤에 잠겨 가라앉은 녀석의 목소리가 좋다. 이 시간도 붙잡아두고 싶지만 신은 매정하게 잊혀질지도 모를 이 시간을 흐르게 하고야 만다. 또다시 찾아온 어색한 기운에 헛기침이 나왔다. 녀석은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너 집에 가면 핸드폰부터 켜놔라.”

“왜.”

“왜는 왜야.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 너도?”

“내가 널 뭐하러 걱정하냐?”

“그럴 줄 알았다.”


또 녀석이 흥얼거리는 소리에 온 신경을 쏟았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또 나대로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단 둘만이 있는 버스정류장. 아직은 쌀쌀한 밤공기도 우리 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일 바다 갈까? 다같이.”


무드 없는 녀석. 한참 감상에 젖어가는데 날 또 현실로 끌어낸다. 인정머리 없는 녀석. 배려심 없는 녀석.


“먼저 간다. 택시-”


일어나 멀리 보이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확히 내 앞에 선 택시의 뒷문을 열고 몸을 구겨 넣었다.


[핸드폰~]


닫힌 문 너머로 녀석을 보자 전화 거는 시늉을 한다. 목적지를 얘기하자 택시는 빠르게 출발했고 녀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녀석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해 하던 두근거리던 심장도 그쳤다. 이게 내 진짜 현실.


[쟤랑 나랑 엄청 울었다?]


묻지 못했다. 왜 그랬냐고 물었다가는 또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며 도망칠 것 같았다. 그렇게 또 싸우고 헤어지고 나면 다시 볼 수 있는 기적은 아마 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씨...”


모든 게 두렵다. 이제 그 녀석을 볼 수 없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녀석의 말처럼 집에 가자마자 핸드폰을 켜고 혹시 녀석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아마 설렘에 잠들지 못할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울던 습관도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드러누워 버리는 습관도 녀석을 갖지 못해 애가 타던 마음도 그 날 그대로. 난 아직도 벼랑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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