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 순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함께할 수 있었을까...
#1.
“이민우 정규 1집 대박을 위하여-”
압구정 로데오 번화가 입구를 들어가 조금 걷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가로등도 불빛이 얕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이 있다. 그 골목으로 15m쯤 들어가면 허름한 곱창집이 하나 있는데, 늘 조용했던 그곳이 오늘따라 시끄러웠다. 건장한 사내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테이블, 그 안에 마치 소년처럼 제법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남자가 일어서서 자신의 이름을 넣어 구호를 외친다.
“민우야, 오늘 정말 멋있었어.”
“장언이형, 진짜 미안해요. 다음부턴 곡도 빨리 내고, 무대도 빨리 짜서 넘겨 드릴게.”
민우와 바로 마주 앉아있던 -오늘 행사의 총책임자로 예상되는- 남자의 말에 민우가 두 손을 합장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쩔쩔매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다음엔 짐 싸 들고 나가 버릴 거야- 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작은 파티 중간에 잠시 자리를 빠져 나온 민우는 술기운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찬바람에 의지해 식혔다. 후- 오늘의 정규 1집 발표 쇼케이스는 성공적이었다. 기자들도 민우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대박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친구들도 가족들도 같은 말을 했다. 이대로만 하면 재기성공이다. 그럴 정도로 잘 해냈는데 어째서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한 걸까.
2년 전, 10대 소녀 팬들과 20대 여성팬을 겨냥해 활동하던 아이돌 중 하나였던 3인조 보이그룹 ‘The One’이 해체되었고 그는 바로 솔로로 전향해 싱글 1집 단 한 장으로 가요계의 트렌드를 휘어잡으며 성공적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싱글 1집을 반년 간 활동하고 접은 후, 이 음악 저 음악 연구하며 노력한 끝에 1년 반 만에 정규 1집을 들고 나올 수 있었다. 그의 솔로 정규앨범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화제가 되었고 준비기간이 길었던 만큼 기대감에 차있었다. 그 역시 오랜 준비 끝에 정규앨범을 낸 것은 말할 수 없는 벅찬 설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넓은 무대 위에 홀로 선다는 것은 너무도 외로운 일이다.
고개를 들어 검은 하늘을 보니 별은 없고 달만이 제법 흐릿하게 보였다. 오늘은 하루 종일 꽤나 눅눅하고 더웠으니 내일은 아마 개운하게 비가 오지 않을까. 쓸데없는 감상을 떨쳐버리기 위해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저기 저 사람 영화배우 아냐?”
“에릭 맞지?”
“무슨 일이야?”
“옆 테이블에 영화배우래. 그 영어이름 쓰고 다니는 애 있잖아.”
일행의 소란스러움에 민우도 옆 테이블로 고개를 돌려 까만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를 보았다. 길에서 우연히 스치더라도 누구든 다시 한 번쯤은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잘생기고 유명한 영화배우 ‘에릭’이었다. 저런 스타가 이런 허름한 곳에? 라는 생각에 머리를 갸우뚱하니 그가 민우의 시선을 느낀 건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헛- 눈이 마주쳐 놀란 가슴에 고개를 휙 돌렸다. 그래도 어째서인지 옆통수가 따가워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또 눈이 부딪혀 이번에는 누가 이기나 싶어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민우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실실 눈웃음을 치던 남자 역시 민우를 한참 보더니 이내 피식 웃는다.
“뭐야, 저 자식-”
민우가 인상을 찡그리며 시선을 피하자 그가 이겼다는 쾌감에 큭큭 대는데 그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왜그래?”
“아니야, 아무 것도.”
재수 없다. 밥맛.
“바람 좀 쐬고 올게.”
분위기가 무르익던 깜깜한 새벽, 휴대전화를 꺼내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3시를 넘기고 있었다. 다시 취기가 몰려와 풀린 눈으로 아까 남자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일행은 있고 그 남자는 없었다. 혼자 가버린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 휴대전화로 삐리링- 문자가 와 휴대전화를 들고 문 밖으로 향했다. 다시 어두운 골목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와 민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엇-”
얼떨결에 끌려간 곳은 가게 뒤쪽이었고 가로등도 닿지 않는 새까만 어둠이라 팔을 잡아당긴 범인의 정체는 쉽게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휴대전화 액정을 켜 범인을 비추자 어둠 속 빛 때문에 남자가 손으로 빛을 차단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아까 민우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던 남자다.
“에.... 에릭?”
“더원 이민우, 맞지?”
중저음의 나긋한 목소리가 감겨와 민우의 귓가를 간질였다. 두근- 순간 민우는 주책없이 뛰기 시작한 심장 때문에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잡혔던 팔을 슬쩍 빼며 들키지 않으려 한 발 뒤로 물러서자 그가 한걸음 민우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아까 웃어서 기분 나빴어요?”
“......”
“귀여워서 웃은 건데.”
실없는 남자의 말에 헛웃음이 나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조금 무안해져 흠흠- 잔기침을 하자 그 남자가 예고 없이 민우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가져가더니 번호를 누른다.
“자주 연락해요. 문자 보내면 답도 좀 주고.”
뭐야, 이거 작업이잖아. 남자한테도 이렇게 서슴없이 작업을 거는 건가.
아무래도 볼 꼴 못 볼 꼴 다 겪는 연예계이다 보니 그에 대한 소문도 듣지 못했던 건 아니다. 그가 작업을 걸면 여자건 남자건 100%의 성공률을 자랑한단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확실히 토종 대한민국 사람임에도 영어이름을 쓰고 헐리우드에서나 볼 법한 외모를 자랑하며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싸고 그 누구보다도 인기 많은 남자이니까. 그런 그이기에 원나잇이라 해도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그가 통화를 누르자 그의 뒷주머니에서 요즘 잘나간다는 걸그룹의 발랄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 뒷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전화를 확인하더니 민우의 이름을 저장하고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번에 앨범 나온 거예요? 오늘 쇼케이스 했다는 기사는 아까 인터넷에서 봤는데. 실시간 1위 뜬 건 알아?”
“......”
“나 씨디 한 장만 주면 안 되나? 사인해서. 나 그런 거 가져보고 싶었는데.”
“......”
“원래 말이 없나? 아까는 말 잘하던데.”
“......”
“내가 형인 거 같은데 형이라고 불러. 반말해도 되지?”
민우가 멍한 표정으로 대답 한마디 없이 눈만 껌벅이자 그가 또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물러설 새도 없이 민우의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날리는 게 아닌가. 민우의 작은 눈이 그의 눈만큼 커져 더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무 말이라도 해봐. 목소리 좋던데.”
그가 민우의 팔을 붙잡아 벽으로 몰아세웠다. 다가오는 에너지가 너무 강렬해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늘 스크린에서나 보던 그가 지금 눈앞에 이 사람이 맞는가 싶어 혼란이 왔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자신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는 그의 눈동자를 보니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은 호수 같았다. 빠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그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민우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본다.
“날... 어떻게 알아요?”
“물어보는 게 고작 그거야? 그러는 넌 날 어떻게 알아?”
“우리나라에서 당신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너는... 나만 알면 돼.”
남자의 커다란 눈이 천천히 감기며 다가왔다. 민우는 피할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도 머릿속도 그에게 결박당해 온전히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혀끝이 마치 뱀처럼 침범해도 숨 쉬는 방법마저 잊을 정도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쿨럭-”
몇 겁의 시간이 흘렀을까. 천만년 같은 몇 분이 지나 그의 얼굴이 멀어졌고 꿈에서 깨어났음을 인식했을 때 다리가 풀려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뇌에서 인식을 못하자 몸 저 구석에서부터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다.
“에, 설마 첫 키스?”
남자는 끝까지 민우의 팔을 잡고 놓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따가울 정도로 기침을 몇 번 더 하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첫키스야?”
“쿨럭- 아닌데.”
“나 땡잡았네.”
그의 화사한 얼굴에서 나오는 말들이 너무 상투적이라 웃음이 났다. 정말 TV에서 보던 과묵한 그와는 정반대의 수다쟁이다. 그런 그를 독점한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나서야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알아챘다.
“이러면 몇 명이나 넘어와요.”
“다-”
“쳇-”
“이거 봐. 너도 넘어왔잖아.”
남자가 민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콩닥거리는 민우의 왼쪽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작은 눈으로 흘기자 그가 또 씩 웃는다. 그래, 저 얼굴에 누가 안 넘어가고 배기냐.
“악마.”
“응.”
“민우야- 가자- 어디 있냐!”
“네~ 가요!”
멀리 두 사람의 공간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우는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쪼그리고 앉아있던 그가 팔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니 귀여운 고양이처럼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원나잇은 안 해요.”
그가 씩 웃더니 벌떡 일어나 민우의 양 볼을 찌부러지게 잡았다. 그리고는 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부딪치고는 민우를 놓아주었다.
“전화하면 받아.”
살짝 손을 흔들고는 주머니에 찔러 넣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혀로 입술을 핥자 달달한 내음이 코끝까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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