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릭민 : Blind love (완)

Blind love 3

너는 모르겠지만 처음 본 순간부터... 




#3.





“민우씨, 스탠바이 하세요.”

“네~”


FD의 말에 겨우 진정시켰던 심장이 또 쿵쿵 뛰기 시작했다. 2년 가까이 정성스레 준비한 정규 1집을 내고 모든 음악프로그램을 통틀어 처음으로 방송을 통해 무대를 선보이는 날이다.


“민우야, 왜 이렇게 떨어.”

“지혜누나... 나 토하겠어...”


민우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민우의 솔로활동 시작부터 계속 함께해 누구보다 친한 코디인 지혜는 작은 강아지 같은 녀석을 껴안고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안겨서 끙끙대는 것이 그룹활동 때 데뷔 무대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다.


“야, 너 데뷔 때보다 더 떠는 거 같다?”

“놀리지 마!”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격려는 커녕 옆에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놀려대는 동완이 때문에 더 속이 탄다.


“이민우가 우주 최고!”

“다 쓰러트리고 와라!”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 동료들의 기를 받고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올라섰다. 이제 시작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민우씨 오늘 멋졌어~ 대박이야~”

“잘 찍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우는 직접 싸인한 씨디들을 스텝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나눠주었다. 으레 매니저나 회사 홍보직원들이 하는 일이지만 민우는 이번이 첫 앨범이니만큼 홍보팀에게 자신이 직접 홍보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반응이 좋다.


“누나 휴대전화 주세요.”

“씨디 잘 나눠주고 왔어?”

“응.”


남은 씨디를 들고 대기실로 들어온 민우가 장난스럽게 두 손을 내밀자 지혜는 민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민우의 휴대전화를 찾았다.


“나도 줘, 싸인씨디.”


휴대전화를 들고 협박조의 말투를 내뱉는 지혜의 모습에 민우는 순간 싸인씨디를 달라던 에릭과의 첫 만남이 생각나 풉- 하며 웃어버렸다. 실성했냐는 지혜의 말에 아니라며 싸인씨디 한 장과 휴대전화를 교환했다. 전원을 켜기가 무섭게 계속 문자가 들어왔다. 몰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낸 팬들의 격려 문자도 있었고 친구들, 동료들, 가족들의 안부문자도 제법 있었다.


“어?”


그리고 그의 문자도.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입가에 손으로 브이포즈를 하고는 민우가 무대를 하고 있는 티비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 보낸 것이다.


[첫방 시청 인증샷. 이민우 제법 멋진 듯.]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데 티비가 제법 낯익다. 이거...


“누나! 나 잠깐만 화장실!”

“어? 야- 어디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지만 이미 방송이 끝난 터라 내려가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게 중에는 민우를 향해 아는 척 하는 사람도 몇 있어 인사를 하고는 급하게 비상계단으로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기다리자 ‘안녕~’하며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요?”

[지하 3층 주차장.]

“올 거면 연락을 하지.”

[그냥 들렀어. 드라마 시나리오 들어와서. 1층 로비에 앉아 있다가 티비 나오기에 봤지.]

“그냥 나 보러 왔다고 하면 내가 좋아할 텐데.”

[응. 우리 민우 보러 왔다가 시나리오 받아서 가고 있어.]

“기다려요.”

[어?]


전화 너머로 끼이익-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마도 브레이크를 밟은 모양이다. 민우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기다려봐. 나 지하 1층이야.”

[계단이야?]

“응.”


뜨거워진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벽에 그려진 ‘B2’라는 커다란 글자를 확인하고는 더 빨리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이다. 조금만 더 가면... 이 문만 열면...


“뭐야! 이 귀여운 생명체는! 10층에서 여길 계단으로 내려온 거야?”


신의 장난일까. 문을 열자마자 마법처럼 그가 서있었다. 기뻐하는 그의 목소리가 온전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귓가에 들리는 건 허공에 울려 퍼지는 심장소리 뿐. 문 너머의 그를 잡아 당겼다.


“혼자... 멋있는 척은 다하고...”


두 팔을 뻗어 그의 목 뒤로 둘러 잡아당겼다. 생각할 틈도 없이 그에게 입술을 부딪쳤다. 두 사람이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서자 쾅- 하며 철제문이 굳게 닫혔다.


“민우...”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우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파악이 되어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에릭은 이미 한 쪽 입 꼬리만을 올리고 미소 짓고 있다. 한손으로 되지도 않는 부채질을 하며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는 씨디를 내밀었다. 아까 스텝들에게 나눠주다 남은 씨디였다.


“이거 주겠다고 13층을 그렇게 뛰어온 거야?”

“달라고 했잖아요.”


씨디를 받아들며 씨익 웃더니 민우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한다.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민우야.”

“응?”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야?”

“싫어요?”

“날 경계하는 건 알겠는데 이 형님은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거든요?”


민우가 믿을 수가 없다며 날름 혀를 내밀자 그는 큭큭 웃으며 민우를 꼭 껴안았다. 민우 역시 그의 허리를 두 팔로 안자 더 가까워진 두 사람의 불규칙한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한 번 믿어봐.”

“큭큭-”

“내 이름 한 번만 불러줘.”


사방이 막힌 복도여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귓바퀴를 감싸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간지럽다. 


“에릭...”

“역시 듣기 좋아.”

“에릭...”


민우는 하루 온종일 긴장했던 마음이 입 안에 막 넣은 달달한 머쉬멜로우처럼 스르륵 녹아 나른해지는 것만 같아 눈이 저절로 감겼다. 그와 맞닿아 있는 모든 신경들이 그에게만 집중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거라면 굳이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굿모닝 에릭 즐거운 소식^^ 형이랑 나랑 스케줄 잡혔어요.]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잠이 깬 에릭은 침대 위를 더듬더듬 짚어 휴대전화를 찾았다. 훗... 까치집을 한 머리에 퉁퉁 부은 눈으로 귀여운 셀카를 찍어 보낸 민우다. 민우랑 나랑 스케줄... 스케줄...?!


“이종현!”

“어라, 깼냐?”


속옷 바람으로 이불만 몸에 둘둘만 채 방에서 뛰쳐나온 에릭을 맞아준 건 매니저인 종현이었다. 에릭이 깰 때가 됐다 싶어 집에 와 거실에서 기다리며 드라마 시청 중이다.


“어여 씻어. 오늘 잡지 촬영이야.”

“단독 촬영 아니었어?”

“아니지, 혜성이랑 거 누구냐... 걔... 이민우? 이번에 앨범 낸 애도 온다던데. 내가 저번에 얘기 안했냐?”

“... 알았어.”


당연히 말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민우를 알기 전이었으므로 흘려들었을 것이 뻔했다. 씻겠다며 욕실에 들어간 에릭은 온몸으로 기쁨을 표출해대고는 소리 없는 만세를 외쳤다.




“안녕하세요~”


먼저 도착해 분장 중이던 에릭은 저 멀리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저기서 민우를 보고는 탄성을 자아낸다. 확실히 요즘의 민우는 연예계에선 최고의 훈남으로 통하니까. 그런 미세한 기운을 감지한 에릭의 코디인 보람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왜, 너보다 인기 많으니까 신경 쓰여?”

“아니.”

“이민우 쟤 참 신기해.”

“뭐가?”

“쟤 주변은 다 반짝반짝 거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좋아해. 눈 감아봐.”


한참을 이어진 보람의 민우찬양에 에릭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보는 사람마다 사랑스러움을 느낄 정도로 주변이 반짝반짝한 녀석. 그래서 그렇게 사람 눈을 못 떼게 한 거냐. 멀리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점점 다가온다. 발걸음도 저벅저벅 저에게로 오는 게 느껴졌다. 다 왔다고 생각됐을 때 쯤 허공에 손을 올리자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아기 손처럼 보들보들한 손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제 왔어요?”

“금방. 밥 먹었어?”

“아니. 머리하고 오느라.”

“어? 둘이 알아?”

“머리 어떻게 했는데.”

“염색.”


에릭이 실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민우가 허리를 숙여 그에게 머리를 보여주는 시늉을 했다. 손을 들어 만져보니 막 머리를 해선지 고운 강아지 털처럼 보들보들한 게 느낌이 좋다.


“브라운.”

“어울려?”

“응. 귀여워.”

“그럼 이따 봐요.”

“둘이 언제부터 알았냐고!”

“좀 됐어.”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제 자리로 껑충 뛰어갔다. 보람의 물음이 이어지지만 그의 온 신경은 저 쪽에 있다. 멀리서 들리는 민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는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했고 의외이기도 했다. 보람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분장을 다 하고 온 혜성이 옆에 와 장난을 건다.


“좋냐. 입 찢어지겠다.”

“티나냐?”

“어쭈?”

“티 많이 나?”

“우웩, 토 나와.”


에릭이 어설프게 두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자 토하는 시늉이다. 다른 데에 신경을 쓰다가도 저쪽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커지면 바로 시선이 간다. 눈치를 보아하니 어쩐지 에릭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뭐야, 너 진짜야?”

“보람이가 그러는데 쟤 빛이 난대.”

“허- 진짠가 보네.”

“민우 안 귀여워?”

“하.나.도. 안 귀여워. 그런데 너 진짜면 다 정리하는 거다. 어? 니가 건드린 애들 다 정리해. 괜히 잘나가는 애 상처 줘서 앞길 막지 말고.”


대답 없이 어깨만 한 번 으쓱 하고 마는 그를 보고 혜성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클럽이나 술집 등을 같이 다니다보니 그의 옆자리에 사람이 바뀌는 걸 늘 옆에서 봐야만 했다. 그는 마치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슴 안에 없는 사람 같았다. 아무리 해맑게 행복한 듯 웃어도 혜성은 그에게서 감정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라 보인다.


“민우 오른쪽으로 고개 약간만 돌리고 에릭 눈빛 강하게 오케이- 포즈 바꾸고-”


첫 촬영은 세 사람의 단체 컷이다. J잡지사에서 기획기사로 20대 연예인 중 미래가 가장 기대되는 스타를 분야별로 설문조사를 했다. 배우부문에는 에릭, 모델부문에는 혜성, 가수부문에는 민우가 1등을 차지했다.


“이제 두 명씩 찍고 그 다음에 개인컷 찍을 거야.”

“저희 먼저 찍으면 안돼요?”


에릭이 재빨리 민우의 뒤에서 한 팔로 목을 껴안고는 반대쪽 손을 번쩍 들었다. 혜성이 보다 못해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옆으로 빠졌다.


“뭐야, 에릭이랑 혜성이랑 같은 회사 아니었어?”

“민우가 더 귀엽잖아요.”

“아하하하하-”


그의 말도 안 되는 이유에 민우가 민망한 듯 크게 웃었다. 에릭이 뒤에서 민우의 목을 껴안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민우 역시 팔짱을 끼고는 에릭의 얼굴에 볼을 맞대었다.


“이렇게 한 번만 찍어주세요.”

“오케이- 행복한 표정 지어봐-”


그리고 에릭과 혜성, 혜성과 민우의 촬영이 이어졌고, 개인촬영 역시 시끌벅적하게 진행 되었다. 사진작가는 즐거운 촬영이었다며 사진이 잘 나올 것 같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민우야, 스케줄 더 있어?”

“잠깐만-”


집으로 갈 준비를 마친 에릭이 혜성을 붙들고 서서는 민우에게 와 물었다. 저쪽에서 코디와 사담을 나누고 있는 매니저에게 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민우는 곧 에릭을 향해 두 팔로 엑스자를 만들어 대답을 건넸다.


“그런데 내일 스케줄 있다고 일찍 들어오래요.”

“알았어. 가자-”


에릭은 두 사람을 양쪽에 붙들고는 오늘 수고한 스텝들에게 모두 인사를 하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밤늦게 끝난 촬영이라 밖은 이미 새까만 어둠 속이었다. 그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세 남자의 발걸음은 각자의 이유로 행복해 보였다.




“아 진짜 왜 그래-”

“한번만 먹어달라니까-”


건너편에 앉은 혜성 때문에 민우는 민망함에 몸부림치느라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에릭은 아까부터 계속 입에 방울토마토를 물고는 민우의 두 팔을 꽉 붙들고는 먹어달라고 거의 애걸복걸 하다시피 하는 중이다. 혜성은 이미 해탈한 듯 보였지만 민우는 귀까지 빨개져 계속 혜성의 눈치만 본다.


“혜성이는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럼 또 이런 거 해달라고 하지 마.”

“응.”


에릭의 확고한 대답에도 한참동안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민우는 씩 웃는 그의 얼굴에 못이기는 척 그의 입에 물려 있는 방울토마토를 물었다. 짓궂게 민우의 뒷목을 꽉 잡고는 놔주질 않는다. 버둥거리지만 대책 없이 당한 일이라 자연히 민우의 KO패였다. 그 사이 룸의 문이 열리며 웨이터 하나가 들어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혜성이 그에게 손짓을 했다.


“진이는?”

“지금 접대 중입니다.”

“언제 끝나?”

“곧 2차 나간다고 하니 빼오겠습니다.”

“그럼 수고 좀 해줘.”


진이가 누구냐며 민우가 귓속말로 묻자 그런 게 있어- 하며 간단히 대답했다. 세 사람 모두 연예인이다 보니 이야기의 화두는 비슷했다. 요즘은 누가 잘 나가며 그 연예인의 실체를 아냐며 여고생 같은 수다가 이어지는데 문 쪽에서 똑똑 소리가 나 세 명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수고-”


아까 퇴장했던 웨이터가 문을 열며 비스듬히 비켜서자 큰 키와 다부진 체구이지만 소년 같은 느낌의 남자가 들어오며 또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웨이터의 짧은 인사에 문이 닫히자 바로 혜성에게 발걸음을 옮기더니 짧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민우는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고 에릭은 언제나 그렇듯 살며시 웃는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전진, 잘 있었어?”

“오랜만에 오네.”

“드라마 준비하느라 바빴어.”

“또 바뀐 거야?”

“이제 안 바뀔 거야.”


에릭의 대답에도 민우를 한참 살펴보던 전진라는 남자는 곧 소파에 길게 누워 혜성의 다리를 베고는 눈을 감았다. 거기다 혜성이 손을 내밀자 늘 있던 일처럼 그 손을 잡고는 제 가슴에 갖다 댄다.


“진아, 놀아줘야지. 자면 어떡해.”

“오늘은 사람들한테 너무 시달려서... 깨고 놀아줄게.”


에릭의 투정에 그가 잔뜩 피곤에 잠긴 목소리를 겨우 짜내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듯 했다. 금방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둘이 애인이에요?”


혜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남자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데 민우는 저도 모르게 작게 우와- 라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에릭은 심술이 난건지 민우의 볼을 꽉 꼬집는다.


“혜성이 멋있다고 하지 마.”

“멋있는데? 에릭형보다 훠어어얼씬~”

“에이- 오늘 안주 왜 이래.”


포크로 과일에 괜한 심술을 부르는 게 영락없는 다섯 살 꼬마다. 딱히 풀어주려고 했던 건 아닌데 그게 또 귀여워 볼에 뽀뽀를 하자 금세 밝은 표정을 짓는다.


“에릭한테 자꾸 잘해주지 마. 바람 펴.”

“야- 말하지 마.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 나는 궁금한데.”


아무 말도 듣지 못하게 민우의 양 귀를 손으로 막자 민우가 한 술 더 뜬다. 혜성이 민우에게 엄지를 들어보이자 민우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답했다. 에릭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민우를 보여주려다 어쩐지 후회막급이다.


결국 잠에서 깨지 않은 전진 덕분에(?) 에릭과 민우는 단 둘이 클럽을 빠져나와 거리를 걸었다. 물론 낮이면 사람들이 알아보는 바람에 걸을 수 없지만 캄캄한 어둠이 드리워진 거리에는 드문드문 술에 취한 사람들 뿐, 두 사람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없었다. 제법 마시던 에릭은 취했는지 걸음걸이가 비틀거렸고 매니저의 당부 때문에 한잔 밖에 하지 않은 민우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걷는 중이다. 사실 술에 취한 에릭을 멀리서 보고 있자니 조금 귀여웠다. 갑자기 풀썩 넘어지는가 싶더니 쪼그려 앉아 중얼거리기도 하고, 음정 박자 가사도 안 맞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또 민우에게 저벅저벅 다가온다.


“민우야, 내가 노래 불러줄게.”

“어떤 거.”

“음... 내가 바람 펴도 너는 절때 피지 마~ 베이베~”


민우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부른다는 것이 바람 피우는 남자 노래다. 민우가 삐졌다며 어깨를 털자 그의 손이 쉽게 떨어진다. 그 와중에도 춤까지 춰가며 노래를 부르는 그는 역시 귀여웠다.


“나는 너를 잊어도 넌 나를 잊지 마~ 미~ 누~”

“아주 어느 놈인지 진짜 시발 놈이네.”

“가끔 내가 연락이 없고 술을 마셔도~”

“얼씨구-”

“혹시 내가 다른 어떤 여자와 잠시 입을 맞춰도...”


노래를 멈춘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춤도 멈춰 멍하니 서있는 그의 반쯤 감긴 눈가에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에 민우는 또 주책없이 심장이 두근거린다. 우뚝 서버린 그 때문에 민우도 멈춰 서 그를 바라보았다. 살짝 풀린 그의 눈이 슬며시 웃었다.


“난 너만 바라봐-”


끝을 흐리며 그의 입에서 마지막 가사가 흘러나왔다. 간질간질 하던 것이 귓바퀴를 타고 내려와 왼쪽 심장을 쿡쿡 찔렀다.


“가사 틀렸어.”

“응?”

“가사 틀렸어.”

“개사 했어.”

“느끼해.”


민우의 핀잔에도 어깨만 한 번 으쓱할 뿐. 또 앞서 걸으며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불렀다. 어쩌면 너무 서툰 고백이라 머쓱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보고 멍하니 있던 민우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그를 불렀다.


“에릭형.”

“응?”

“혼자 살아요?”

“어?”

“혼자 사냐고요.”

“... 응.”


짧은 대답에 민우는 그에게 한걸음 더 다가갔다.



'릭민 : Blind love (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Blind love 6  (0) 2015.04.06
Blind love 5  (0) 2015.04.06
Blind love 4  (0) 2015.04.06
Blind love 2  (0) 2015.04.06
Blind love 1  (0) 2015.04.06